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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집: 『해동역사』 (2), 유득공 서문. 1823년(순조 23) 2월 1일

by 사업하는 철학자 2025.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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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업하는 철학자입니다.

 

『해동역사』 소개에 이어서, 그 서문 원문과 해석 살펴볼게요.

 

 

 


 

 

『해동역사』의 서문은 한치윤의 벗 유득공이 지었습니다.

 

유득공은 기존에 우리나라 역사서로 참고할 만한 것은 『고려사(高麗史)』 뿐이며, 고려 이전의 역사를 살펴볼 만한 사서가 없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해동역사』 서문(序文): 유득공(柳得恭)

 

 

東史, 凡幾種哉! 所謂古記, 都是緇流, 荒誕之說, 士大夫不言可也.

우리나라의 역사책이 무릇 몇 종이던가. 이른바 옛 기록(古記)이라 하는 것들은 모두 세속적인 것(緇流)으로 허황되고 황당한 말이라서 사대부들이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다. 

 

金富軾三國史, 人咎其脫畧不足觀.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대해 사람들은 ‘소략하여 볼만한 것이 없다’고 허물한다.

 

而名山石室茫無所藏, 雖金富軾亦且奈何. 

그러나 명산(名山)의 석실(石室)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가 하나도 없으니, 김부식인들 그런 처지에서야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然則惟有鄭麟趾高麗史而已, 高麗以前何從而鏡考乎.

그렇다면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일 뿐인데, 고려 이전에 대해서는 어떻게 고찰할 수 있겠는가.

 

余甞欲取二十一史東國傳, 刪其重複, 以注以辨. 

이에 내가 일찍이 중국의 21사(史)에서 동국전(東國傳)만을 취해, 중복된 부분을 삭제하고서, 주석하고 변증을 하고자 하였다. 

 

與三國高麗二史相依而行, 則庶幾有資於徵信, 卒卒未遂, 亦未甞不去來于胸中

《삼국사기》와 《고려사》 두 사서와 함께 참조하여 보면, 밝혀 믿는(徵信)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는데,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였고, 생각은 항상 가슴속에 맴돌고 있었다.

 

吾友韓大淵上舍性恬靜, 喜畜書閉戶考古.

나의 벗 상사(上舍) 한대연(韓大淵)은 성품이 고요하고, 서책을 간직하기를 좋아하고, 문을 닫고 들어앉아 역사를 연구하였다.

 

慨然有意於東史, 與余不謀而合. 又推而廣之, 汎濫乎正史之外, 我東數千年事實, 自經傳以至叢稗, 在在散見者幾盡搜剔抄寫.

분개하며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 나와는 서로 상의하지 않아도 뜻이 합하였다. 그런데 또 이를 미루어 넓혀서, 정사(正史) 이외의 것까지도 섭렵하여, 우리 동방 수천 년의 사실에 대해 경전(經典)에서 패설(稗說)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을 찾아내고 베꼈다.

 

又手刀, 與糊離而合, 合而離蓬, 首流汗殆, 忘寢食.

또 손수 자르고, 붙이면서 분류하기도 하고 합하기도 하였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땀은 비 오듯 흘리면서, 자고 먹는 것조차 잊었다.

 

用十數年之力, 始分類立目, 勒成一部凡幾.

십수년이나 공력을 쏟고서야, 비로소 종류별로 나누고 조목을 세워, 한 부(部)의 서책을 만드니, 모두 몇 권이나 되었다. 

 

卷有世紀焉, 有列傳焉, 天·地理·禮樂·兵刑·官氏·藝文, 各有其志, 則居然而史矣. 

그 가운데는 세기(世紀)도 있고, 열전(列傳)도 있으며, 천문(天文), 지리(地理), 예악(禮樂), 병형(兵刑), 여복(輿服), 예문(藝文)에 대해 각각의 지(志)가 있어서 저절로 역사서가 되었다.

 

之曰海東繹史, 余所有意而未遂者, 一朝焉獲之, 不亦快哉!

이를 이름하여 《해동역사(海東繹史)》라 하였다. 내가 생각은 있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였던 것을 하루아침에 얻으니 그 역시 시원스러운 일이 아닌가.

 

東人或言, 東方史籍在平壤者, 焚於李勣, 其在完山者, 又焚於甄萱之敗. 此亦無稽之談. 東方豈有史籍. 

우리나라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사적(史籍)이 평양(平壤)에 있던 것은 이적(李勣)에게 모두 불탔으며, 전주(全州)에 있던 것은 견훤(甄萱)이 패하면서 모두 불에 탔다.”라고 하는데, 이 역시 근거 없는 낭설이다. 우리나라에 어찌 사적(史籍)이 있었던가. 

 

箕聖之世, 斯可以斷自唐虞·衛滿以前, 屬之不修春秋.

기자(箕子)의 시대는 당우(唐虞)부터 위만(衛滿) 이전에 해당하고 보면 역사(春秋)를 쓰지 않는 시대에 속한다.

 

漢四百年, 自是內服, 樂浪太守焉得立史官哉!

한(漢) 나라 4백 년 동안에는 내복(內服)의 나라였으니, 낙랑(樂浪) 태수(太守)가 어떻게 사관(史官)을 둘 수 있었겠는가. 

 

此所以佚事異聞, 必求諸中國然後可得也. 

이 때문에 일사(佚事)와 이문(異聞)을 반드시 중국 쪽에서 구한 다음에야 얻을 수 있다.

 

嶺東之濊, 漢南之韓, 盖馬山東之沃沮, 苟非陳壽, 惡能知其有無哉! 

영동(嶺東)의 예(濊)와 한수(漢水) 남쪽의 한(韓), 개마산(蓋馬山) 동쪽의 옥저(沃沮)에 대해 참으로 진수(陳壽)가 아니면 어떻게 그런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겠는가.

 

彼陳壽者, 秉筆而書海表之事, 能若是之詳者, 又何也. 公孫氏世襲遼東太守, 立帶方郡, 以統韓濊諸部, 司馬懿滅之, 則其山川·道里·物産·謠, 必爲太史氏所得也. 

저 진수란 자가 붓을 잡고 바다 바깥의 우리나라의 일에 대하여 이와 같이 상세하게 쓸 수 있었던 것은 또 어째서인가. 공손씨(公孫氏)가 대대로 요동 태수가 되어 대방군(帶方郡)을 세워 한(韓), 예(濊)의 여러 부를 통괄하다가 사마의(司馬懿)에게 멸망되었으니 산천(山川), 도리(道里), 물산(物産), 풍요(風謠)에 대하여 반드시 태사씨(太史氏)가 전해 들었을 것이다.

 

自是以後曰三國, 又有加羅耽牟羅之屬, 皆發使執幣見于上國. 南北諸史從而記之, 此莫非東方史籍也. 

이 이후로는 삼국(三國)이라 하며, 또 가라(加羅)니 탐모라(耽牟羅)니 하는 족속이 있어서 모두 사신을 보내고 폐백을 바치면서 상국(上國)에 알현하였다. 그러므로 남조(南朝)와 북조(北朝)의 여러 역사책에서 이에 따라서 기록하였는바, 이 모두가 우리나라의 사적인 것이다.

 

幸而大淵之書, 今又成矣, 富哉, 無所不有.

다행히 대연(大淵)의 책이, 지금 또 이루어져 풍부히 없는 것이 없다.

 

昔剡子朝, 魯昭子問, 少皥氏鳥名官, 何故也. 剡子曰, 吾祖也, 我知之. 

옛날에 섬자(剡子)가 노(魯) 나라에 조회 가자 소자(昭子)가 물었다. “소호씨(少皥氏)가 새의 이름으로 관명(官名)을 삼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섬자가 말하기를, “나의 조상들의 일이니 내가 그 일을 잘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孔子聞而學之, 籍談如周不能對晉之分器. 王曰, 叔氏而忘諸乎.

공자(孔子)가 그 말을 듣고서 나아가 배웠다. 그리고 적담(籍談)이 주(周) 나라에 가서 진(晉) 나라가 주나라로부터 명기(名器)를 나누어 받은 것에 대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왕이 말하기를, “숙씨(叔氏 숙(叔)은 적담(籍談)의 자(字))이면서도 그 사실을 잊었단 말인가?” 하였다.

 

是故, 不知本國之事者, 古之君子耻之, 若之何不觀是書也.

이 때문에 본국(本國)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을 옛날의 군자들은 부끄러워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儒州, 柳得恭, 序

유주(儒州) 유득공(柳得恭)은 서(序)한다.

 

 

 


 

 

우리에게 유득공은 발해고의 저자,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 시대로 인식한 학자로 유명하죠.

서얼 출신 학자로 실학 사상가이면서 역사가인 유득공에 대해 알아보고 마칠게요.

 

 

 

유득공(柳得恭) 소개

 

유득공(柳得恭, 1748년 12월 24일 ~ 1807년 10월 1일)은 조선시대 후기 북학파 실학자, 문신, 시인입니다.

조선 정조 치세 시대 당시의 실학자로서, 조선 경기도 포천군 군수 직책을 지냈습니다.

 

그의 본관은 문화(文化,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

자(字)는 혜보(惠甫), 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 영암(泠菴), 가상루(歌商樓), 고운거사 (古芸居士), 고운당(古芸堂), 은휘당(恩暉堂) 등입니다.

 

박지원의 제자로,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입격(합격)하고,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가 되었으며 포천, 제천, 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풍천부사에 이르렀습니다.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와 함께 4대시가(四大詩家)라고도 불렸는데, 이서구를 제외하고는 최초 규장각 검서이자, 서얼입니다. 

 

 

*박지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조선 후기의 북학(北學)의 대표적 학자, 실학자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 양반전(兩班傳), 허생전(許生傳) 등의 풍자 소설을 집필한 문학가로 유명하다.

서얼이 아닌 정통 노론 가문의 양반이다. 

 

 

규장각 검서 당시 다양한 서적을 읽으며, 청나라 중심의 세계관을 확장하고, 신라사 위주의 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고, 이후 발해고와 사군지 등을 출간하였습니다.

외직에 있으면서도 검서를 겸임하여, 1779년(정조 3)에 발탁된 초대 검서관으로,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4검서라고 불렸습니다. 

 

 

*검서관:

검서관은 규장각 안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관원이다.

검서관은 규장각 각신을 도와 서적을 편찬하고 간행할 때 교정과 필사를 담당하였고, 간행된 서적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하였다. 검서관이 핵심이 되어 서적을 편찬⋅간행하기도 하였다. 

 

검서관의 정원은 4명이었고,  정조는 문예가 뛰어난 서얼을 채용함으로써, 신분적 한계로 말미암아 관직 진출이 어려웠던 서얼이 학문적으로 명망을 떨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 이해, 특별히 서얼 출신들을 채용하였다.

정조가 서얼들의 불만을 무마시키면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추진했던 서얼허통정책(庶孼許通政策)을 시행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이후 결원이 생길 때 전임 검서관들이 후보자를 추천하면 규장각 각신들(제학, 직제학, 직각, 대교 등)이 시험을 실시하여 검서관을 선발하였다.

 

유득공을 아끼던 정조(1800년 8월 18일)가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였습니다.

그는 개성, 평양, 공주 등과 같은 국내의 옛 도읍지를 유람하였고, 두 차례에 걸쳐 중국 베이징에 연행(燕行)하고 돌아왔으며, 자신이 경험한 문물과 경험을 토대로 기행문과 소설, 역사서 등의 뛰어난 저술을 남겼습니다.

1807년 10월 1일(순조 7년)에 59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유득공 초상화는 명확하지가 않아요. 

 

 

 

4가시인 중 한 명인 이서구라고도 하고, 유득공이라고도 해요.

 

매일신문: https://www.imaeil.com/page/view/2024020511202896147

세종대왕신문: https://www.sejongki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8

 

 

 

특히, 매일신문은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이 작성한 칼럼인데

우리 역사 인물에 대한 보다 확실한 고증이 필요합니다.

 

우리 학계의 현실이죠.

 

 

박지원 초상화. 추사박물관

 


 

 

사람은 끼리 끼리라고 어울린다고 하는데요.

역사 의식이 투철한 벗이 남긴 두 저작 모두 우리에게 소중한 문헌, 기록 유산입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단지 기록된 사건만이 아닌, 그 역사물이 저작된 당시의 시대적, 사회정치적 배경으로부터도, 그 맥락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데이터 종합 능력은 뛰어나지만, 인간은 인간 고유의 판단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정 사건에 의해 함몰돼 편향적 시선에 치우치기보다는, 그 역사적 기록을 통해 보다 더 나아갈 수 있는 우리나라가 돼야겠습니다. 

 


 

4월이면 완연한 봄이겠죠.

 

산불도 났고, 정치도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따스한 봄날 모두들 행복하고 편안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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