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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당일치기 유적 둘러보기(2): 황룡사지, 안압지, 대릉원

by 사업하는 철학자 2025.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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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업하는 철학자입니다.

석굴암과 불국사를 중심으로 한 경주 당일치기,

남은 일정 이어서 공유할게요.

 

 

석굴암-불국사-황룡사지, 분황사-안압지(동궁과 월지), 에밀레종-첨성대, 대릉원-월정교

 

 

황룡사지

황룡사는 신라의 사찰로 경주시에서 가장 컸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 고종 25년(1238년), 고려-몽골 전쟁의 여파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습니다.

현재 그 터인 황룡사지(皇龍寺址)는 사적 제6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553년(진흥왕 14년) 기공이 시작되어, 569년에 담장까지 완공되었다고 여겨지나, 

566년(진흥왕 27년) 일단 준공되었다가, 645년(선덕여왕 14년)에 완성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황룡사는 9층 목탑과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과 더불어,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유명합니다.

 

관람 안내

관람시간 : 정해진 관람시간 없음 
관람료 : 무료 
주차정보 : 황룡사지황룡사역사문화관 주차장(구황동 707), 무료 이용

 

 

황룡사, 황룡사지 소개

황룡사는 장장 백여 년에 걸쳐 건립된 국찰이었으며, 동양 최대의 사찰로 이름을 떨쳤다.


553년(
진흥왕 14년)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 자리에서 누런 용이 나타났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왕은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해 17년 만에 절을 완공하였다.

이후 584년(진평왕 6년)에는 인도에서 건너온 철과 금으로 만든 5m 높이의 거대한 삼존불상을 모시기 위해 금당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643년(선덕여왕12년)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대사의 권유로

호국의지를 담아 9층 목탑을 짓기 시작했는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2년 만에 완성되었다.

이 목탑은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그 시대의 간절한 소원이 표현으로 된 것이다.

 

아쉽게도 황룡사는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졌다.

지금은 광활한 대지에 건물터와 주춧돌 일부만을 확인할 수 있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 금동귀걸이, 와당, 기와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높이 1.8m에 이르는 대형 치미는 건물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황룡사 9층 목탑 또한, 고려-몽골 전쟁 시기에 불타버렸고 현재는 탑의 초석(礎石)만이 남아 있다.

 

*치미(鴟尾):

고대의 목조건축에서 용마루의 양 끝에 높게 부착하던 장식 기와

 

https://www.kocis.go.kr/koreanet/view.do?seq=6860

 


 

분황사: 모전석탑

벽돌처럼 깎아서 만들었다는데,

생각보다 큰 규모에 다보탑, 석가탑과 더불어 참 웅장했어요.

관람 안내

관람시간: 08:00-18:00(동절기 17:00까지) 
관람료: 무료
주차정보: 분황사 주차장 이용(무료) 

 

 

https://www.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116836

 

 

 

분황사 소개

분황사(芬皇寺)는 634년(선덕여왕(善德女王) 3년)에 낙성된 이래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의 전성기와 함께했던,

1,400년 동안 법등(法燈)을 밝혀 온 유서 깊은 사찰입니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왕분사(王芬寺)로 잘못 적혀 있는데요.

분황(芬皇)이라는 사찰의 이름은 '향기로운 임금', 곧 선덕여왕 본인을 가리키며, 직역하면 '여왕(여제)의 사찰', '여제를 위한 사찰'로 풀이됩니다. 선덕여왕 자신이 사후 분황사 동쪽에 묻혔습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으로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로써, 그 규모는 약사도량(藥師道場)으로써 약사불(藥師佛)을 모신 보광전(普光殿)과 석탑, 그리고 요사채의 단출한 규모일 뿐이지만,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인 자장(慈藏, 590년~658)과 원효(元曉, 617~686) 등이 주석한 곳으로써 창건 당시의 사찰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분황사는 신라를 대표하는 화가 솔거의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고, 원효대사의 업적을 기리고자 고려시대 세운 비석의 받침돌인 화쟁국사비적, 석조 우물 등이 남아 있습니다. 

분황사 모전석탑(模塼石塔)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7층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확실하지 않으며, 지금은 3층만 남아있습니다.


또, 신라시대부터 사용했다고 전하는 우물 ‘삼룡변어정’이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원성왕 때 당나라 사신이 우물 속에 사는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하게 한 뒤 가져가려는 것을 쫓아가 다시 가져왔고, 이후 이 우물을 삼룡변어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해요. 천 년이 지난 우물은 아직도 마르지 않고 물이 차오릅니다

 

 


 

동궁과 월지(안압지)

관람 안내

어른(만 19~만 64): 3,000원

청소년(만 13~만 18), 군인: 2,000원

어린이(만 7~만 12): 1,000원

 

  • 이용시간: 09:00~22:00
    (※ 매표 및 입장 마감시간: 21:30까지)
  • 휴 무 일 : 연중무휴
  • 주차장 만차 시 인근 황룡사 역사문화관 및 박물관 주차장 이용 가능
  • 유아(24개월 미만) 동반 및 거동이 불편한 이용객의 편의 제공을 위해 유모차, 휠체어를 무료로 대여함. 

주차료: 무료

 

안압지 소개

본래 신라 별궁으로, 신라의 태자가 사는 곳이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 궁궐 유적으로,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폐허가 돼 갈대가 무성한 호수에 기러기(雁)와 오리(鴨)들이 날아들자 안압지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이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동궁(東宮)이라는 이름은 신라의 법궁이었던 경주 월성의 동쪽에 있다는 데에서 붙은 이름으로,

이 궁궐의 바로 남서쪽에 경주 월성이 붙어 있습니다.
1980년,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통일신라시대에 해당 호수를 월지(月池)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확인됩니다.

'월지'란 명칭은 반월성(半月城)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여, 2011년 7월부터 이곳의 정식 명칭도 오랫동안 써 왔던 '안압지' 대신 '동궁과 월지'로 변경되었습니다. 

 

 

 


 

에밀레종(국립경주박물관)

현재는 박물관 외부에 위치한 에밀레종을 안 보고 올 수 없죠.

20분마다(정각, 20분, 40분) 녹음된 종을 울려요.

 

관람 안내

관람시간 : 매일 10:00 - 18:00 / 일요일, 공휴일 10:00 - 19:00
야간연장개관 : 10:00 - 21:00(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3~12월 매주 토요일)
정기휴관일: 1월 1일, 설날, 추석
관람료: 무료(특별전 제외)


주차정보: 전용 주차장(무료) 이용 

 

http://www.koreatimes.com/article/1369529

 

에밀레종 설화

경덕왕은 아버지를 위해 종을 만들기로 하여 신라 곳곳에서 모금이 벌어졌다. 

그중에는 부잣집, 가난한 집, 따스하게 맞이하는 집 싫어하는 기색을 하는 집도 있었다. 

 

"아이고, 스님, 저희 먹을 것도 없어요. 보세요, 저희 집에 드릴 거라곤 이 애 밖에 없어요.

가져가실 거면 이 애라도 가져가시든가요."

 

스님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 집을 나왔다.

모금이 모이고, 전국에서 기술자들이 온갖 정성을 들여도 종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소식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경덕왕은 관원에게 점을 치게 했는데, 스님에게 자신은 애 밖에 없다고 한 아낙네 때문에 부정을 탄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 부정을 씻어 낼 수 있나요?"

"그 아낙네가 한 말을 지키는 것밖에 없습니다.

종을 만드는데 낼 것이 아이 밖에 없다고 했으니 그리해야지요"

 

결국 그 집 아이를 종 만드는데 바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종이 드디어 울리기 시작했다.

 

"에밀레...... 에밀레......" 

 

엄마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에미탓에...... 에미탓에.......' 같기도 하여,

에밀레종이라 부른다고 전해진다.

 

 

선덕대왕신종 소개

신라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설화에 따라 에밀레종으로 부르거나 봉덕사(奉德寺)에 걸려 있던 종이라 하여 봉덕사종이라 부르기도 한다.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봉덕사종 즉 성덕대왕신종이

1460년(조선 세조 5년), 영묘사(靈妙寺)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후 다시 부윤 예춘년(芮椿年)이 부임하고 있던 1506년(연산군 12년) 정월에서 이듬해, 중종 2년(1507년) 12월 사이의 시점에 경주읍성 남문(징례문) 바깥의 봉황대(鳳凰臺) 아래에 종각을 짓고 옮기고는, 

성문의 개폐 및 군사 동원 신호에 사용하였다.

 

1915년 8월 경주고적보존회에 의해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975년 5월 국립경주박물관이 신축됨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1992년, 제야에 서른세 번 종을 친 뒤 한동안 타종을 중단하였다가,

2004년 12월, 안전 보존을 위해 더 이상 타종을 중단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상원사 동종(국보),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보물)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전한 형태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다.

높이 3.66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손자인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설화로 인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린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연꽃봉우리를 사각형의 연곽(蓮廓)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앞, 뒷면 두 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꽃모양으로 굴곡진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 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당시의 종교와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된다.

 

 


 

 

첨성대

관람 안내

관람시간 : 09:00 -22:00(동절기 21:00까지), 연중무휴

관람료 : 무료

 

첨성대 소개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 첨성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 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 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 9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 자 모양으로 맞물린 기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첨성대를 이루는 돌들은 저마다의 의미를 가진다.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진 첨성대의 모양은 하늘과 땅을 형상화했다.
첨성대를 만든 365개 내외의 돌은 1년의 날수를 상징하고, 27단의 돌단은 첨성대를 지은 27대 선덕여왕을, 꼭대기 정자석까지 합치면 29단과 30단이 되는 것은 음력 한 달의 날수를 상징한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측자가 드나들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가운데 창문을 기준으로 위쪽 12단과 아래쪽 12단은 1년 12달, 24 절기를 표시한다.
하늘의 움직임을 계산해 농사 시기를 정하고, 나라의 길흉을 점치는 용도로도 첨성대가 활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대릉원: 천마총

대릉원의 고분 사이에 목련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모습은 관람 포인트입니다.

 

대릉원에 들어서서 황남대총 근처에는,

대릉원을 대표하는 천마총이 있습니다.

 제155호 고분은 ‘천마총’이란 이름을 가졌고, 고분 내부를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덤입니다.

 

옥황상제가 하늘에서 타고 다닌다는 말이 지상에 내려온 듯 상서로워 보이면서도 경쾌한 천마의 그림.

말다래에 그려져 있던 ‘천마도’가 바로 이 무덤에서 나왔어요.

 


관람 안내

어른(만 19~만 64): 3,000원

청소년(만 13~만 18), 군인: 2,000원

어린이(만 7~만 12): 1,000원

 

관람시간: 09:00-22:00(매표마감 21:30) 
관람료: 무료 (천마총 유료) 

  • 휴무일 : 연중무휴
  • 반려동물 입장 불가


주차정보:
대릉원 공영 주차장(계림로 9, 유료)

노동공영주차장(태종로 767, 유료)

쪽샘 임시주차장(원화로 181번 길 진입, 무료) 

 

경주 사적지 입장권 온라인 발권 시스템 : http://gjpass.kr/

 

주차료

소형: 2,000원

대형: 4,000원 

*주차장 이용시간 : 07:00~22:00

*2시간 초과 후 1시간마다 50% 요금추가
*장애인/국가유공자:50% 할인
*경차, 친환경차:50% 할인 

 

대릉원 소개: 미추왕릉, 황남대총

12만 6,500㎡의 넓은 땅에 23기의 신라시대 고분이 모여 있는 대릉원을 중심으로 그 일대에 고분유적이 산재해 있다.
주목해서 보아야 할 고분은 제13대 미추왕릉과 거대한 표형분(쌍분)의 황남대총, 고분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천마총이 있다.

미추왕릉은 경주 황남동 무덤들 중 가장 잘 정비된 대릉원 내에 높이 12.4m, 지름 56.7m의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앞에는 혼이 머무는 자리인 혼유석이 있고, 담장을 돌려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다.

무덤 앞쪽에는 숭혜전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794년 다시 세운 것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이다.

내부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봄날 벚꽃놀이 명소로도 유명한 미추왕릉에는 댓잎군사 설화가 전한다.
신라 초기, 이서국에서 신라를 침입했을 때 머리에 댓잎(대나무잎)을 꽂은 군사들이 몰려와 그들을 물리쳤는데

군사들에게 꽂혀 있던 댓잎이 미추왕의 무덤 앞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

사람들은 그 후 미추왕릉을 별칭으로 죽장릉(竹長陵),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렀다. 


현재 외형이 복원되어 있는 황남대총은 두 개의 고분이 쌍봉낙타의 등처럼 남북으로 이어져 있는데,

2개의 원분(圓墳)이 남북으로 연접된 표형분(瓢形墳, 표주박형 분묘)으로

동서 지름 80m, 남북 지름 120m, 남분 높이 22m, 북분 높이 23m에 이르는 경주에서 가장 큰 고분이자,
신라 최대의 봉토분(封土墳)이다.

황남대총 남분의 피장자는 남자, 북분의 피장자는 여자이며 신라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1970년대 발굴조사 당시 5만 7천여 점에 달하는 유물이 나왔다.

북쪽 무덤에서는 금관을 비롯한 ‘부인대’라는 여자 허리띠와 목걸이, 팔찌 등의 장신구가 나왔고,

남쪽 무덤에서는 남자의 뼈와 금동관과 무기 위주의 유물이 발견되어 남녀의 무덤, 부부의 무덤이라 추정한다. 

천마총: 천마도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대릉원 내에 위치해 있으며, 무덤 내부를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는

천마총(天馬塚)은 신라 21대 소지왕 혹은 22대 지증왕,

잠정적으로 지증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지름 47m, 높이 12.7m 고분이다.

피장자의 키는 160cm 내외로 추정된다.

 

1973년에 발굴되며 천마도(국보 제207호), 금관(국보 제188호), 금모(국보 제189호) 등 11,297점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유물 중에 순백의 천마(天馬)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그림이 그려진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천마도가 출토되어 천마총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그 밖에 서조도(瑞鳥圖)와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도 출토되었다.

 

최근에 이르러서 천마총의 천마 그림이 말이 아닌 기린의 그림, 즉 기린도(麒麟圖)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기린은 성인이 세상에 나올 징조로 나타난다고 하는 상상의 짐승을 말한다.

몸은 사슴과 같고 꼬리는 소의 꼬리에, 발굽과 갈기는 말과 같으며 빛깔은 5색이라고 알려져 있다.

 

천마총에 보이는 천마는 머리에 뿔이 표현되어 있고 입에서 신기(神氣)를 내뿜고 있는 것은 기린 그림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이며

뒷다리에서 뻗쳐 나온 갈기의 표현은 기린이나 용 등의 신수(神獸)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표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볼 때 말보다는 오히려 기린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된다.

 

2017년 보수 후 원래 위치에서 조금 밀려서 복원된 목곽을 원 위치로 옮기고

적석과 봉분을 제대로 복원하였으며 관리용 복도 부분도 전시 부분으로 활용하고 있다.

 

 


 

월정교

누각 2층에 올라갈 수 있게 공개하는데요.

창을 열어놓지는 않아서 외부를 볼 수 있지는 않지만,

월정교의 건축 과정 등에 대해 간략한 아카이브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관람 안내

관람시간 : 09:00-22:00
관람료 : 무료 
주차정보 : 월정교 공영주차장(교동 153-5, 무료) 이용

 

https://www.safe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079

 

월정교 소개

월정교(月精橋)는 신라 790년(경덕왕 19년)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수도 서라벌에 건설된 다리이다.

춘양교(春陽橋)라고도 불리는 

일정교(日精橋)와 함께 국왕이 사는 궁궐인 경주 월성과 건너편의 남산 지역, 도당산성(건너 언덕에 있는 토성)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일정교는 신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다리는 남아 800여 년을 버티다, 16세기 초반 이전에 관리부족으로 무너졌다고 추정된다.

 

월정교란 이름은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경덕왕 19년 “궁궐 남쪽 문천에 월정교,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을 통해 알려졌다.

신라 당시의 명칭은 깨끗할 정(淨) 자를 쓴 월정교(月淨橋)였으나, 

고려 시대에 정할 정(精) 자를 쓴 월정교(月精橋)로 바뀌어 현대까지 이른다.

 

경주시와 문화재 당국은 월정교가 다른 소실된 신라 시대 목조 건축물들에 비해서

비교적 규모가 작고 문헌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는 등의 사유로 우선 복원을 추진했다. 

 

2007년 본격적으로 복원이 시작되었다.
2013년 교량복원을 먼저 마치고, 이후 다리 양쪽의 문루(門樓)를 마저 지었다.
문루 2층에는 교량의 복원과정을 담은 영상물과 출토 유물을 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있다.


조선시대에 유실되어 없어진 것을 10여 년간의 조사 및 고증과 복원을 진행해 2018년 4월 6일 완공됐고,

같은 해 11월부터 항시 개방으로 전시되고 있다.

 

월정교 자체는 실제로 존재했던 다리이나, 남은 것은 석축과 일부 부재뿐이기 때문에, 교량과 누각의 형태는 대부분 상상에 의존하였다. 
그럼에도, 낮에는 월정교의 자태를 오롯이 볼 수 있어 좋고, 밤의 월정교는 또 다른 매력이 드러난다.
월정교 앞에 설치된 징검다리에서 월정교를 바라보자. 강 위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월정교를 담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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