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사업하는 철학자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의 주요 역사적 인물인 추사(秋史) 김정희에 대해 알아볼게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역사학자·금석학자·서예가·화가로 여겨질만큼,
김정희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서예가로, 문학·역사·지리 등 다방면에 해박했습니다.
김정희는 조선 후기 실학자로서, 한국의 전통문화와 역사를 탐구하고 기록하는 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김정희는 평생 동안 벼루 10개에 구멍을 내고 붓 1000자루를 닳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김정희 약식 소개
출생-사망(향년70세): 1786년(정조 10년) 6월 3일-1856년(철종 7년) 11월 7일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추사(秋史),
호는 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입니다.
김정희는 평생 343개의 명호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본관은 노론 벽파 명가인 경주 김씨로,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법적 증손주입니다.
화순옹주는 생전 자식이 없어서 김정희의 조부가 양자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직접 피가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같은 경주 김 씨인정순왕후와는 먼 친척뻘로, 김정희의 양증조부 김한신은 정순왕후의 7촌 숙부입니다.
추사체라는 글씨나 금석문의 대가이자, 후학도 많이 양성했고 중요한 관직도 맡았었습니다.
생애로 살펴보는 관련 이야기
- 김노경과 기계 유 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큰아버지 김노영이 아들이 없어 양자로 입양되었다.
- 젖을 떼자마자 붓을 가지고 놀았다.
부친 김노경이 붓을 빼앗으려 하자 붓을 쥐려고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릴 정도로 붓에 애착이 강했다고 한다.
이를 보고 주변에서는 훗날 명필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 영특한 재능을 보고 감탄한 박제가에게 제자로 가르침을 받았다.
결혼 직후인 1801년(순조 원년)에 어머니를 잃고, 20살 때 아내, 계모, 스승 박제가도 잃었으며
3년상 후 1809년(순조 9년) 생원시에 장원 급제하였습니다.
1810년(순조 10년)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호위 자제 군관으로 따라갔다가
60일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 청나라 최고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웠다.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무상 기증까지 했다.
이후 벼슬에 나오지 않으면서 <실사구시론>과 같은 책을 썼으며
1816년(순조 16년) 무학대사나 고려 태조 왕건의 비로 알려졌던
- 북한산 비봉의 비를 신라 시대의 진흥왕 순수비라고 고증이 올바름을 확실하게 했다.
또 다른 순수비인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도 직접 찾아가 수습하지는 못했지만, 황초령비의 보존에도 김정희의 공이 컸다.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은 김정희가 진흥왕 순수비 중 황초령비와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두 차례에 걸쳐 판독하고, 고증한 후 저술한 금석학 논문으로, 철종 3년(1852)에 완성하였다. 운연과안록(雲烟過眼錄), 또는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소장 중이다
1819년(순조 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병조 참판에까지 올랐고,
1827년(순조 27년) 순조 임금의 외아들인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필선이 되었다.
1830년(순조 30년) 효명세자가 죽자 안동 김 씨인김우명이 탄핵하여 파면되고 아버지는 귀양을 갔다.
순조는 귀양을 보낼 때, '조정에서 나오는 말이 쫓아내라 몰아내라 이딴 거밖에 없구나.' 라고 했다.
안동 김 씨 기세에 눌렸지, 귀양은 순조도 내키지는 않았다로 해석된다.
1834년(순조 34년), 순조가 승하하던 해에 복귀되어 아버지와 함께 조정으로 돌아왔다.
1835년(헌종 원년) 풍양 조 씨가정권을 잡자 복귀해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840년(헌종 6년) 윤상도의 옥에 관련되어 고초를 겪고, 제주 대정현에 유배되었다. - 8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귀하게 자라 음식 투정을 했다.
유배기간에 추사체를 만들었다.
1851년(철종 2년)에 헌종의 능을 옮기는 문제로 파직되어, 67살이란 늙은 나이에 추운 지방인 함경도 북청도호부로 유배를 갔다. - 유배기간 동안 고대 석기를 연구했다.
석노가(石砮歌)에서 그는 귀신의 조화로 보던 돌도끼나 돌화살촉을 도구이자 무기임을 밝혀냈다.
김정희는 금석문(金石文, 금속이나 돌에 새긴 문자나 기록)을 연구하면서, 역사적 건축물과 관련된 민속 자료를 중요하게 여겼다.
석노가는 성곽 축조와 관련된 민속학적 자료로서, 김정희의 연구 대상이었던 금석문과 긴밀히 연결된다.
그렇게 도합 총 12년 유배하고,
과거 아버지가 경기 과천에 마련해 둔 과지초당(瓜地草堂)에 머물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 1856년(철종 7년), 71살에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가, 그해 음력 10월 10일 과천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했다고 하는데 김정희의 마지막 작품은 봉은사의 판전 현판으로, 세상을 떠나기 4일 전에 쓴 글이라고 한다.
사진 출처: https://www.chosun.com/opinion/2021/09/15/5F2RFFL5HNAQFFR3SGXSRHBRAQ/
靑蓮詩境(청련시경): 푸른 연꽃과 같은 시의 경지
珊糊碧樹(산호벽수): 산호 가지와 벽수 가지처럼 어울려 융성하라
*석노가(石砮歌):
석노가를 노동요로서 기록하며, 당시 산성 축조 과정에서 불렸던 민요와 그 문화적 맥락을 사료로 남겼습니다.
김정희는 석노가의 가사가 단순한 노동요 이상으로, 노동자들 사이의 협동과 지역사회의 염원을 담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석노가를 단순히 민요로 간주하지 않고,
그것이 담고 있는 노동의 의미, 공동체 정신, 그리고 전통 문화의 가치를 인식하며 이를 보존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는 그의 학문적 깊이와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업적-추사체, 백송, 세한도, 석파란
추사체
명필답게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추사체를 만들었습니다.
현대에도 가장 많이 배우고 사용하는 서체이며, 추사체로 쓰여진 병풍이 많습니다.
추사의 글씨는 예서(隸書)에서 출발하고 있으면서 예서의 변형인 한대(漢代)의 필사체(筆寫體)를 충분히 익혀 부조화스러운 듯하면서 조화되는 글씨의 아름다움을 천성(天成)으로 터득하고 있습니다.
선의 태세(太細)와 곡직(曲直), 묵(墨)의 농담(濃淡) 등으로 글자 하나 하나에 구성과 역학적인 조화를 주었고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서축(書軸)을 이룹니다.
이는 획(劃)과 선으로 이어지는 공간 구성에 의한 예술로서 추상(抽象)의 경지에까지 도달하는 예술이라고 평가됩니다.
추사의 서체는 여러 유명 추종자들을 보았으나, 그 진수(眞髓)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단명(短命)으로 끝났습니다.
괴(怪)하지 않으면 역시 서(書)가 될 수도 없다더니,
다른 필체인데, 모두 추사체입니다.
세한도
제주도 유배 시절 세한도, 겨울철 소나무를 그렸습니다. 국보 180호로 지정됐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크기는 23 X 69.2 cm입니다.
사실, 원근법도 맞지 않아서 잘 그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김정희가 문인화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사의(寫意, 그림보다 의미가 중요하다)'를 가장 잘 나타내는 그림이기 때문에 유명합니다.
세한도는 추사가 이 그림을 그리게된 과정과 그 감정을 잘 나타냈다는 점에서 유명합니다.
참고로, 제주도 대정읍에 있는 김정희 미술관인 추사관 건물은 〈세한도〉의 건물을 본떠서 만들었습니다.
백송
중국 소나무 중 하나인 백송을 좋아해서, 씨앗을 가져와 고향 예산의 고조부 김흥경(金興慶)의 묘소 앞에 심었습니다.
현재 천연기념물 10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김정희 선생의 서울 본가에도 영조(재위 1724∼1776)가 하사한 백송이 있어, 백송은 김정희 선생 일가의 상징처럼 여겨집니다.
'용궁리 백송'은 수령이 200살이 넘는다고 하며 높이는 14.5m 가슴 높이 둘레가 4, 77m에 달합니다.
줄기가 밑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아쉽게도 두 가지는 죽고 한 가지만 남아 빈약한 모습입니다.
참고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은 성장이 늦고 잔뿌리가 적어, 옮겨 심으면 금방 죽어서 전문가도 키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번 뿌리를 내리면 수명이 길어 1000년 이상을 산다고 합니다.
따라서, 남아있는 대부분 백송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석파란
난초 그림 역시 독보적인 수준으로 '석파란(石坡蘭)'으로 유명합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을 직접 가르친 스승이기도 합니다.
석파(石坡) 이하응은 김정희와 조희룡(趙熙龍), 허유(許維)로 이어지는 이른바 추사파(秋史派) 사군자화의 명맥를 이어받은 인물입니다. 김정희는 이하응이 지닌 천부적 자질을 갈고 다듬어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켰습니다.
그 산물이 바로 ‘석파란(石坡蘭)’으로 불리며 일세를 풍미하였던 그의 묵란화입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입니다.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유물은 이하응의 73세 때 작품으로 좌우대칭의 일반적인 석파란이 아니라 특이한 구도를 취했다는 점에서 작품성이 돋보인다.
난엽은 길고 예리하게 뻗어 있으며,
괴석은 전작에 비해 바위묘사가 소략되었으나 거칠고 빠른 필치로 마무리 된 바위표현에서 경쾌함이나 호쾌한 기분이 묻어나는 듯하다.
왼쪽 중앙에 “壬辰春石坡七十三叟作”이라 제가 쓰여 있어, 임진년 봄에 석파가 그렸음을 알 수있다.
제 하단부에‘大院君章’(백문방인), ‘石坡’(주문방인)이, 그 하단 그림부분 바위 중앙에 '一室之內有以自娛' (주문방인) 총 3개의 인이 찍혀있다.
현재는 추사체를 컴퓨터 폰트로 재해석한 추사사랑체도 있습니다.
또한, 예산군 읍내에서는 출생지임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 구간의 점포 간판이 이 폰트로 통일돼 있습니다.
우리는 추사 김정희에 익숙한데, 사실 추사의 명확환 연원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음은 <추사, 명호처럼 살다>의 저자의 분석입니다.
참고: https://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62
“추사(秋史)는 추상(秋霜)같이 엄정한 금석서화가(金石書畵家)란 의미로 자신을 이른 명호이다.
추사는 가을 서리같이 엄정한 금석학자이자 서화가란 의미이다.
옛날 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참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업적을 남겼습니다.
요즘은 한 우물이라도 깊게 파기 어려운데, 참 귀감이 됩니다.
그래도 김정희의 생애, 주요 업적 등에 대해 어느정도 알아봤네요.
좋은 주말 보내시고, 관련된 견해 함께 나눠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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