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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와 서적

조임도: 간송선생문집 서문(澗松先生文集序)

by 사업하는 철학자 2024.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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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업하는 철학자입니다.

 

오늘은 한국문집 중, 간송집, 그중 이광정(李光庭)이 쓴 간송선생문집 서문(澗松先生文集序) 중 일부 살펴볼게요.

 

먼저, 간송이라 하면, 문화재 수집가 간송 전형필이 떠오르는데요. 호만 같을 뿐, 다른 인물입니다. 

 

 

 

간송(澗松)은 산골물 '간'자와 소나무 '송'자로

한겨울에도 얼지 않고 흐르는 물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란 뜻입니다.

 

조임도와 전형필, 시대가 다른 두 분 모두 그런 마음으로 이런 호를 지니고 살았을까요?


간송집이란?

『간송 선생 문집(澗松先生文集)』

조선 후기의 학자, 조임도(趙任道, 1585~1664)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744년에 간행한 시문집입니다.

목판본이며, 본집 5권, 별집 2권, 도합 7권 4책입니다.

조임도를 향사하고 있는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송정리송정 서원에서 간행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744년(영조 20)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의 편집을 거쳐 그의 현손(손자의 손자)인 홍엽(弘燁)이 간행하였습니다.

첫 부분에 1744년 이광정이 지은 서문(序文)이 있습니다.

그 뒤에 세계도(世系圖)와 연보를 제시하여, 조임도의 가계 및 생애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이광정은 제자인 권만(權萬)·권모(權謩) 등과 함께 교정하여 8권 4책의 정본을 완성하였다.

이 정고본(定稿本)은 원집 5권, 별집 2권,

그리고, 양천익(梁天翼)이 편차한 간송 연보(澗松年譜) 1권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8권이라고 했지만,

연보는 원집에 포함되어 실제적으로는 7권 4책입니다.

 

이후에 후손 조선수(趙善秀)가 원집에서 누락된 시문들을 수습하여,

19세기 후반 무렵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에게 편정을 받았습니다.

 

1930년에 이르러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이 교정하고, 후손 조병규(趙昺奎) 등이 주도하여

부록 1책을 포함한 5권 2책의 속집을 추가하여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장안리합강정(合江亭)에서 12권 6책의 목활자본으로 간행하였습니다.


간송집 평가 및 구성

남명학파 학자들은 남명 조식(曺植)의 영향으로 저술이 적은 편인데,

조임도의 『간송집』은 12권 6책으로 비교적 내용이 풍부합니다.

*조임도의 아버지, 입암(立巖) 조식(埴)과 다른 인물입니다.

 

또한 이 문집에는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의 학문을 계승하고 조화하고자 노력한 조임도의 학문과 행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간송집』을 통해 1623년 인조반정 이후 큰 시련을 겪은 경상우도의 학자들이 어떻게 시련을 이겨내고,

새로운 전망을 세우고자 노력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평가됩니다.

 

권 1, 2에 시 268수가 실려 있습니다.

권 1에는, 오언 고시(五言古詩), 오언 절구(五言絕句), 오언 율시(五言律詩)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고,

권 2에는 칠언 고시, 칠언 절구, 칠언 율시, 칠언 배율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권 3∼5에 소 1편, 서(書) 29편, 잡저 11편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서(書)는 주로 경전·예설에 관해, 장현광(張顯光)·유진(柳袗)·정온(鄭蘊)·조평(趙平)·윤순거(尹舜擧) 등과 논술한 것입니다.

권 3에는 상소(上疏) 1편, 편지(便紙), 잡저(雜著) 11편이 실려 있고

권 4에는 서문 5편, 기문(記文) 2편, 제발(題跋) 15편, 잠명(箴銘) 5편, 제문(祭文) 16편 등이 실려 있고,

권 5에는 축문(祝文) 4편, 비지(碑誌) 3편, 행장(行狀) 4편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잡저 중 「우언(寓言)」에서는 난세를 당했을 때 선비의 출처문제를 논하였습니다.

「잡설(雜說)」은 현자라고 해서 반드시 명성을 남기는 것이 아님을 밝힌 글로써,

은연중 자신을 비유하였습니다.

「저익설(沮溺說)」에서는 옛날 은자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의 고사를 예로 들어, 처세하는 방법을 문답식으로 설파하고 있습니다.

「기이(記異)」에서는 불교의 허탄함을 변론하여 반박했고,

「관규쇄설(管窺瑣說)」에는 존성(存誠)·거경(居敬)·궁리(窮理) 등 학문하는 방법과

붕당에 관한 논리 등 참고가 되는 기사가 많습니다.

「봉선초의(奉先抄儀)」에는 제례의식으로 시제(時祭)·기제(忌祭)·묘제(墓祭) 등 10개 조항의 의식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제시했는데,

많은 사림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별집 권 1은 취정록(就正錄)과 어떤 일을 기록한 6편의 녹문(錄文)과 서문 1편, 설(說) 1편, 기문 1편이 실려 있습니다. 

별집 권 2는 부록으로, 조임도의 생애를 서술한 묘갈명(墓碣銘), 죽음을 애도하는 만장(輓章)과 제문,

송정 서원 건립에 관련된 사림의 상소·예조 회계(禮曹回啓)·상량문(上樑文)·봉안문(奉安文)·상향문(常享文),

합강정의 상량문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사사속소(謝賜粟疏)」는 1662년(현종 3) 임금으로부터 곡식을 받은 데 대한 사례와 아울러

엄궁금(嚴宮禁)·친유신(親儒臣)·흥교학(興敎學)·수무비(修武備) 등 시무 14조,

명분·기강·사치 등 시폐 4조를 열거하고, 시행책과 개혁책을 촉구한 상소문입니다.

 


조임도는 누구?

조임도는 효심이 극진하여 백효(伯孝, 첫째가는 효자)라고 불렸습니다.

인조반정 직후 공조좌랑을 역임하였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학업에 열중하였습니다.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치원(致遠)·덕용(德勇), 호는 간송(澗松).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후손입니다.

처음에 기도(幾道)라는 이름으로 지었는데

조임도의 삶에서 오랫동안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승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말해

아버지가 임도(任道)로 바꾸었습니다.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司䆃寺僉正)을 지낸 입암(立巖) 조식(埴)이며,

어머니는 충의위(忠義衛) 유상린(柳祥麟)의 딸 문화 유씨(文化柳氏)입니다.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는 삼종형(三從兄, 팔촌 형)입니다.

 

부인은 노파(蘆坡) 이흘(李屹)의 딸 벽진 이씨(碧珍李氏)이며,

훈도 이춘길(李春吉)의 딸 안악 이씨(安岳李氏)와 재혼하였습니다.

 

아들이 없어 종형 조면도(趙勉道)의 둘째 아들 조함변(趙咸抃)을 후사로 삼았습니다.

 

8세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합천으로 피난하였고,

14세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경상북도 청송으로 피난하였습니다. 

합천, 청송, 영주, 봉화, 의성, 인동 등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습니다.

 

조임도는 젊은 시절에 퇴계학파의 학자들에게 수학하여 학문을 익혔습니다. 

봉화에서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제자인 반천(槃泉) 김중청(金中淸)에게 수학했으며,

의성에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인 두곡(杜谷) 고응척(高應陟)에게 배웠습니다.

또한 인동으로 옮겨가서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습니다.

 

이처럼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남명(南冥) 조식(植)의 학문과 삶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존경하고, 그리워했습니다.

조임도는 1623년 인정반정 이후, 경상우도 지역이 큰 시련을 겪은 시기에 활동하면서

남명학파와 퇴계학파가 서로 화합하여 발전할 수 있도록 중개자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아쉽게도 인물 그림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https://www.grandculture.net/haman/toc/GC06200517

 

『간송집』 - 디지털함안문화대전

[정의] 조선 후기 함안 출신의 학자 조임도의 시문집. [저자] 조임도(趙任道)[1585~1664]는 어릴 적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합천, 청송, 영주, 봉화, 의성, 인동 등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

www.grandculture.net

 


서문 원문 발췌 및 번역

不佞少遊南州, 聞先生之風。

내가 어릴 적 남쪽 고을에서 유학할 때 선생의 풍도를 들었다.

 

有執鞭欣慕之願, 而猶恨未得其詳也。

채찍을 잡고 따르고 싶어 했던 흠모의 소원이 있었으나, 오히려 그 상세한 내용을 얻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年冬, 先生玄孫弘燁氏奉先生遺文, 北走四百餘里。

금년 겨울, 선생의 현손 조홍엽(趙弘燁) 씨가 선생의 유문(遺文)을 받들고, 북쪽으로 400여 리를 달려왔다.

 

抵不佞曰: 先祖棄斯世八十餘年, 其遺文不行於世。願吾子勘正, 而且序其所編次者焉。

나에게 말하길, “선조께서 세상을 떠난 지 80년 되었는데, 그 (어른이) 남긴 글이 세상에 간행되지 않았습니다. 바라건대 그대께서 감정해 주시고, 또 편차의 순서를 정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不佞老廢無識, 何敢當!

나는 늙고 쇠약한 데다 아는 것이 없으니,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顧不佞忝在槃泉外裔之列, 而大父晩聞公與先生有同門之義。 

하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외람되이 반천 선생의 외손 항렬에 들어있고, 조부이신 만문공(晩聞公)께서 선생과 동문수학한 의리가 있었다. 

 

趙君以是責不佞, 則亦有所不敢終辭者。

조 군이 이 점을 들어 나에게 청하였으니, 그 역시 감히 끝내 사양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乃與前騎省郞權君萬及其從弟謩, 相與校訂。

그래서 전() 기성랑(騎省郞) 권만(權萬) 군과 그 종제인 권기(權諅)와, 함께 서로 교정하였다.

 

序次如左, 而又書其平日所嘗感慨者以俟後人。

순서를 다음과 같이 정하고, 또 평소에 일찍이 감개하였던 점을 써서 훗날 사람들의 질정을 기다리는 바이다.

 

其亦不自量也。

이 또한 스스로 나 자신을 헤아리지 못한 처사이기는 하다.

 

雖然, 後之學者苟就本集而潛心焉,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훗날 학자가 만일 이 문집을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생각하면,

 

亦可以見先生忠孝之實, 學問之正, 志義之烈。

또한 선생의 충효의 실제, 학문의 올바름, 굳센 뜻과 의리를 볼 수 있다.

 

裨於風敎者不淺淺也。

풍속교화에 보탬이 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若其文章光輝發見於詞章之間者。在學者自得之。不佞不敢置一喙焉。 

문장의 광휘가 글 속에서 드러난 것 같은 것은 학자들이 스스로 터득하는 데 달려 있으므로, 내가 감히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겠다.

 

上之二十年甲子十有二月乙丑。

금상 20년(1744, 영조 20) 갑자 12월 을축일.

 

後學平原李光庭。序。

후학 평원(平原) 이광정(李光庭)이 서문을 쓴다.

 

 

많은 질정 바랍니다.


 

함께 공부하고 싶은 한국문집 또는 한문 글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이번 연도의 마지막 달이죠.

십이월 첫째 주 모두 행복하게 보내시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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