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부와 서적

송시열: 송자대전 권수(卷首)

by 사업하는 철학자 2024. 12. 10.
반응형

안녕하세요. 사업하는 철학자입니다.

 

오늘은 한국 문집 중, 송시열의 송자대전 앞머리 일부분을 살펴볼게요.

 

송시열은 누구?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 후기의 정치가유학자, 저술가, 중신(重臣)이자 

왕에 필적할 만큼 강한 권신(權臣)이었습니다.

 

송시열은 조광조, 이이, 김장생, 김집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조선 주자학의 대학자로서,

송시열을 빼놓고는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상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당대는 물론 이후의 조선 정치와 사상에도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인데요.

 

조선왕조실록에 3천번 이상 언급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상당히 엇갈리는 해석과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던 서인의 영수이자 노론의 종사로서,

인조부터 숙종까지 4대조를 섬긴 원로대신입니다.

 

후학들은 그가 공자, 주자에 버금간다며 해동성인(海東聖人) 또는, 송자(宋子)라 불렀습니다.

훗날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양현전심록>이라 하여 주자의 일생과 송시열의 일생을 비교한 글을 쓰기도 했고

즉위 이후에는 내탕금과 국비를 지원하면서까지 <송자대전> 등의 문집과 저서들을 간행했습니다.

 

송자대전이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 송시열의 문집으로, 우리나라의 개인 문집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의 책이라고 여겨집니다.

 

《송자대전》의 구성은 목록 2권, 원집 215권, 부록 19권, 송서습유(宋書拾遺) 9권, 송서속습유(宋書續拾遺) 3권,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 13권으로 도합 261권 130책으로 편차되어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송자대전 권수(卷首)에는

정조가 송시열의 묘소와 송시열을 향사하는 서원 및 사당에 내린

임금이 친히 내린 비석에 새긴 글인 어제(御製)비명(碑銘)과 사제문() 8편이 연대순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御製御筆大老祠廟庭碑銘 幷序 ○今上丁未

어제 어필 대로사 묘정비명 병서 ○ 금상 정미년(1787, 정조 11)

 

*大老祠: 우암 송시열의 영령(英靈)

 

御篆: 大老祠碑 碑面大字

대로사비[大老祠碑] 임금이 쓰신 전자(篆字)를 비 표면에 큰 글자로 쓰다. 

 

天下之大敎五, 祀賢與居一焉。

천하의 큰 가르침 다섯 가지 중에, 선현을 제사하는 것이 그 하나이다. 

 

賢者, 敎之所由起也。故燔燎羶薌, 以報其精。

현자는 교화가 흥기하게 되는 유래이니, 전향(羶薌)을 태운 향기로 그의 정기(精氣)에 보답한다.

 

蘋蘩薀藻, 以報其德。簠簋籩豆, 以報其文。

빈번(蘋蘩)과 온조(薀藻)로 그의 덕에 보답하고, 보궤(簠簋)와 변두(籩豆)로 그의 문장에 보답한다.

 

洞屬恍惚, 以報其敬。然後庶乎其顧歆焉。

정성스럽고 황홀한 마음으로 그의 공경에 보답한다. 그렇게 한 뒤에야 현자의 정령이 돌아보고 흠향할 것이다. 

 

然祀必有義, 其義則不寧是也。

그러나 제사에는 반드시 의의가 있으니, 그 의의는 이뿐만이 아니다. 

 

若周公之祠, 必建于東洛。武侯之廟, 必隣于永安。此之謂義。

주공(周公)의 사당을 반드시 낙양에 세우고, 제갈 무후(諸葛武侯)의 사당을 반드시 영안(永安)에 가까이 둔 경우, 이를 의라고 일컫는다. 

 

我孝宗大王, 以千一之聖。値百六之運。懷保瘡痍之民。

우리 효종대왕(孝宗大王)은 1000년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성인이다. 극심한 국가 위기를 만나, 고달픈 백성들을 돌보았다.

 

密勿帷幄之謨, 而時則有同德之臣, 契托魚水。

은밀히 궁중에서 계책을 도모하였고, 그때 뜻이 맞는 신하가 있어, 물고기와 물이 서로 의탁하듯이 하였다.

 

道秉春秋, 用能先後疏附, 迪彝敎於窮宙, 卽先正宋尤菴是已。

《춘추》의 도를 가지고, 앞뒤에서 이끌어 주고, 뭇 신하를 거느리고 왕을 따라 떳떳한 가르침으로 인도한 이가, 바로 선정(先正) 송우암(宋尤菴)이었다.

 

*先正: 선대 현인, 선현

 

及夫孝廟賓天, 先正獨立無所歸。

효종이 승하하자 선정은 홀로 서서 돌아갈 곳이 없었다. 

 

當仙寢之移奉于驪也, 嘗密邇珠丘, 泣瞻松柏。

그리하여 왕릉을 여주(驪州)로 옮겨 모실 때, 능 자리 가까이에서, 송백(松柏)을 바라보고 눈물지었다.

 

以寓其烏號不忘之思, 人到今指點其地, 而想君臣之際矣。

떠난 임금을 못 잊어 하는 마음을 부쳤기에,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 자리를 지적하며, 뜻이 맞았던 군신(君臣) 사이를 생각하게 된다.

 

今去先正之沒, 且一百年。

이제 선정이 떠난 지도 어언 100년이 되었다. 

 

其生長之鄕, 藏修之處, 淵源之所自來, 杖屨之所曾遊。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공부하고 수양하던 곳, 학문을 전수받은 곳, 발자취가 머물던 곳에서 

 

或專享, 或配食以修以明。殆無憾於崇報之典。

오직 선정만을 향사하기도 하고 배식(配食)하기도 하였다. 도를 닦고 덕을 밝혀, (현인을) 높이고 보답하는 전례에 거의 유감이 없을 것이다. 

 

惟是驪上指點之地, 刱祠於乙卯間, 旋爲朝議之橫潰, 毀撤而止。

다만 사람들이 지적하던 여주의 그곳은 지난 을묘년(1735, 영조11)에 사우(祠宇)를 세우려다가, 곧 조정 논의가 어지러워지는 바람에,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다.

 

夫祠院之設, 本出庠序之遺制。

무릇 사원(祠院)의 설립은, 본래 옛날의 상서(庠序)의 유제에서 나온 것이다.

 

院必有祠, 實取於米廩之祭瞽宗。

원(院)에 반드시 사우를 둔 것은, 실로 미름(米廩)으로 고종(瞽宗)에서 제사하던 뜻을 취하였다.

 

則是人之祀是地。固莫不有精義存焉。

이 사람을 이곳에서 제사하는 것은, 진실로 정밀한 의리가 있는 것이다.

 

況先正之於寧王, 亦周公之相成王, 武侯之佐昭烈。

더구나 선정과 영왕(寧王 효종)의 관계는, 주공이 성왕(成王)을 돕고, 무후가 소열제(昭烈帝)을 보좌했던 것과 같다.

 

其如水在地之靈, 尙肯一日不在於於昭陟降之傍乎!

어디에든 있는 영령이, 단 하루라도 하늘을 오르내리시는 영왕의 신령 곁에 있으려 하지 않겠는가. 

 

嗚呼! 他祠寧可已。驪上之祠, 不可以不設也。

아, 다른 곳의 사당을 그만둘지언정, 여주의 사당만은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予於踐阼三年己亥, 諏吉祇謁于寧陵。駐驆于驪之淸心樓, 

내가 즉위한 지 3년째인 기해년(1779)에, 길일을 물어 영릉(寧陵)을 배알하고, 여주 청심루(淸心樓)에 머물 때,

 

多士齊籲, 以先正之祠爲請。

많은 선비들이 일제히 한목소리로, 선정의 사우를 세우자고 간청하였다.

 

予樂聞而許之。後七年乙巳, 祠始成。

나는 즐거이 듣고 허락하였다. 7년 후인 을사년(1785)에, 사우가 비로소 낙성되었다.

 

乃妥靈于祠, 命名曰大老祠。

그제야 (선정의) 영령을 그 사우에 모시고, ‘대로사(大老祠)’라 명명하였다. 

 

越三年丁未, 以先正降生之三周甲。

또 3년 후인 정미년(1787)은, 선정이 탄생한 지 세 주갑(周甲) 되는 해이다.

 

豎碑于庭, 具道其祀之之義。

뜰에다 비를 세우고 그 제사 지내는 의의를 갖추어 이르는 것이다.

 

祠在州治數百步淸心樓西, 距寧陵二里而近。

사우는 고을 관아에서 몇백 보 떨어져 청심루 서쪽에 위치하고 있고, 영릉과의 거리는 2리 정도로 가깝다. 

 

鶴麓鎭其背, 巖巖千仞之壁立。

그 뒤로는  학록(鶴麓)이 버티고 지키는데, 1000길이나 되는 낭떠러지의 우뚝함으로 서 있다.

 

驪江控其襟, 滔滔萬折之必東。

그 앞으로는 여강(驪江)이 휘감아 흐르는데, 만번을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는 도도함이다.

 

南有霞峯蓴澤, 拱揖以呈奇。

남쪽에는 하봉(霞峯)과 순택(蓴澤)이, 손 모아 읍하듯 기이한 경치를 드러내고 있다.

 

北有燕灘龍門, 繞繚以爭姸。

북쪽에는 연탄(鷰灘)과 용문(龍門)이 있는데, 서로 아름다움을 다투듯이 둘러싸고 있다.

 

地之形勝, 若有待而益章焉。

그 자리의 뛰어난 형세가 마치 오늘을 기다린 듯이 더욱 빛을 내고 있다.

 

雖然, 凡我守先正之祠, 講先正之學者, 

그렇지만, 선정의 사우를 지키고, 선정의 학문을 강론하는 우리가,

 

苟不能服膺乎日星之義, 觀感乎洛閩之統,

진실로 해와 별처럼 빛나는 대의(大義)를 가슴에 새기고 낙민(洛閩)의 이어온 맥을 살펴보고 감화되지 못하여,

 

*洛閩: 주자와 정자의 학문을 의미하는 정주학을 가리킨다. 지명에 따라 낙민학이라고도 한다.

 

進揖退讓, 色莊而心慢,

진퇴와 읍양(揖讓)을 하는 데, 겉모습만 의젓하고 마음은 태만하거나,

 

春詩冬禮, 始勤而終怠,

사시사철에 따라 시(詩)와 예(禮)를 익히는 데, 시작만 부지런히 하고 끝에 가서 흐지부지해 버린다면,

 

則豈所以體先正之敎, 而祀之義不幾泯乎!

어찌 그것이 선정의 가르침을 체득하는 길이겠으며, 향사하는 의의도 거의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祀賢之所以爲敎者, 思其義也。

현자를 향사하는 것이 가르침이 되는 까닭은 그 의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諸生勉乎哉。遂爲之銘曰。

여러 유생(諸生)은 그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마침내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命世之出。必待聖王。喜起明良。自古一堂。

佑我寧人。錫我宗公。雲龍風虎。蔚焉合章。

眷言神京。萬事於悒。何以明之。

春秋數十。龍髥莫攀。貂裘在襲。

老臣血淚。驪江之楫。蒼梧入望。耿光孔邇。

山榛隰苓。伊誰云思。不沫遺躅。風動多士。杖屨攸止。

有祠特起。淸心霽月。彷彿德容。學符紫陽。派接栗翁。

直字眞訣。衣被群蒙。凡百君子。曷不祝宗。

一體明禋。百代敉文。昭融宿契。長近苾芬。

偏予曠感。早服典訓。岌峙牲石。刻示無垠。

 

불세출의 인재는 / 命世之出
반드시 성왕을 기다리네 / 必待聖王


명군과 양신이 기뻐하고 흥기하여 / 喜起明良
예로부터 한자리에 모였었네 / 自古一堂


우리 영인을 돕고 / 佑我寧人
우리 선공(先公)을 도와 / 錫我宗公


구름이 용을 따르고 바람이 범을 따르듯 / 雲龍風虎
성대하게 법도에 부합하였네 / 蔚焉合章


저 중국 형세를 돌아보면 / 睠言神京
만사가 그저 답답할 뿐이라 / 萬事於悒


무엇으로 밝혀야 하겠는가 / 何以明之


《춘추》의 대의(大義) 수십 가지라 / 春秋數十
돌아가신 선왕을 붙잡을 길 없어 / 龍髥莫攀

담비 갖옷은 습의(襲衣)가 되었네 / 貂裘在襲


노신은 피눈물 흘리며 / 老臣血淚
여강에서 노를 젓노라니 / 驪江之楫


창오가 한눈에 들어와서 / 蒼梧入望
그 모습 잡힐 듯 가깝구나 / 耿光孔邇


산에는 개암이요 펄에는 도꼬마리라 / 山榛隰苓
그 누구를 그리는가 / 伊誰云思


남기신 자취 없어지지 않아 / 不沫遺躅
선비들이 유풍에 감동받아 / 風動多士

발자취가 머물던 곳마다 / 杖屨攸止


사우가 우뚝이 들어섰네 / 有祠特起
청심루 갠 하늘의 달빛이여 / 淸心霽月


선정의 덕스러운 모습과 비슷하구나 / 彷彿德容
학문은 주자의 학문과 부합하고 / 學符紫陽

연원은 율곡의 학통을 이었도다 / 派接栗翁


오직 곧을 직 자를 진결로 삼아 / 直字眞訣
몽매한 무리에게 은택을 끼쳤으니 / 衣被群蒙


이 세상 모든 군자들이 / 凡百君子
어찌 축종으로 삼지 않으리 / 曷不祝宗


한결같이 밝게 제사 모시니 / 一體明禋
백대를 두고 그 공이 빛나리라 / 百代敉文


전생의 인연으로 마음이 통하여 / 昭融宿契
길이 제향(祭香)을 가까이하게 되었네 / 長近苾芬


남달리 내가 광세지감 느낀 것은 / 偏予曠感
일찍부터 그 가르침에 심복해서라 / 早服典訓


이 비를 우뚝이 높이 세워 / 岌峙牲石
새긴 글 후세에 보여 주리라 / 刻示無垠

 


백년 전 현인으로부터 이렇게 직접적인 감동을 받고 이렇게 절절한 비문을 작성했다니. 
후대인들이 올바른 뜻을 계승하고 이어 나가길 바라는 정조대왕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집니다. 
인간 간의 소통은 시공간을 능가하네요. 

번역은 고전번역원을 참고했습니다.

많은 질정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