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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와 서적

왕수인: 왕양명 인물 탐색-심학, 심즉리, 치양지

by 사업하는 철학자 2024.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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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업하는 철학자입니다.

 

송대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자는 익숙한데요. 그와 함께 대립적인 인물로 왕양명이 많이 언급됩니다. 

 

그러나, 조선을 주자의 나라라고도 할 만큼, 한국에서는 양명학이 천대받아 왔는데요.

물론 주자에 대한 다양한 비판도 존재하지만, 주자가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명나라 사람 왕양명(1472.10-1529.1)의 생애와 그 사상적 특징에 대해 간략히 알아볼게요.


 

중국 명나라 중기의 철학자이자 정치가 및 군인인 왕수인(王守仁)의 호가 양명(陽明)입니다.

호를 사용하여 왕양명(王陽明)이라고 곧잘 불리고, 

심학(心學)의 대성자이자, 양명학(陽明學)의 창시자입니다.

 

*양명학이란 이름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에 다카세 테츠지로에 의해서 확립됐습니다.

그 이전에는 왕수인의 성을 따 왕학(王學) 혹은 육왕학(陸王學)이라고 하였습니다.

육왕학이라고 불린 이유는 심즉리(心卽理)를 중시했던 남송의 사상가 육구연(陸九淵, 1139년~1192)의 사상을 이어받았다는 이유로 '왕학' 앞에 육구연의 성이 붙은 것입니다.

왕수인은 「상산문집서(象山文集序)」에서

육구연(=육상산)과 그 자신이 맹자의 심학(良知學)을 정통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양명학은 당시 과거시험 합격에 치우쳐 있었던 주자학(朱子學)을 비판하며 창시했습니다.

양명학을 창시함으로써 이지(李贄), 하심은(何心隱), 나여방(羅汝芳) 등 제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의 나카에 도주(中江藤樹)가 일본에 양명학파를 설립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학문(大學問)》과 《전습록(傳習錄)》, 《사서훈의》 등 저서를 통해 그 사상을 알 수 있습니다. 

왕양명의 저작은 훗날 《왕문성공전서(王文成公全書)》로 모아졌습니다.

 

시대적 배경 및 전체 시기 구분

남송(南宋) 이후 원(元)과 명(明)을 지나며,

관학(官學)으로서의 지배적 지위를 차지했던 주자학(朱子學)이 교조화되었습니다.

 

명 초기에 『사서대전(四書大全)』과 『오경대전(五經大全)』이 편찬되었고,

여기서 과거 시험 시제가 출제되면서 학문과 사상은 고착화되었습니다.

 

대다수 학자들은 경전의 글자를 해석하는 훈고(訓詁)나 문장과 시가에 주력하였습니다.

명대에는 설경헌, 호경재, 나흠순(羅欽順)과 같은 걸출한 주자학자도 배출되었지만 전반적으로 위축과 침체를 보였습니다.

 

일본 학자 곤도 야스노부(近藤康信)에 따르면,  왕양명의 일생은 대략 다섯 시기로 구분됩니다.

 

  • 첫째, 15~16세까지의 유년 만학 시기
  • 둘째, 31세까지의 회의와 혼미의 시기
  • 셋째, 이후 38세까지 작은 깨달음의 자립 시기
  • 넷째, 38세에서 50세 전까지 개오하여 활약하던 시기
  • 다섯째, 이후 56세까지 대오하여 완성한 시기

 

채인후(蔡人厚)는 세 가지 과정, 큰 변화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사장(문장과 시가)에서,

둘째는 불교와 노장사상에 드나들다가,

셋째는 귀주(貴州) 용장(龍場)에서 도를 깨우친다.


 

10대-20대 시절: 실천적 학습과 반복된 의식적 사고 

왕양명은 어렸을 때 가정에서 조부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양명은 5살 때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11살 때 아버지를 따라 북경(北京)으로 향할 때 금산사를 지나가다가 시부를 지었는데, 그 지혜가 타인을 놀라게 했다.

이후에는 주로 숙사에게 배웠다고 한다.

양명은 소년 시절부터 자신만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비판정신이 있었고 독창력이 있었다.

 

양명은 17살 때 부인 제씨(諸氏)를 남창(南昌)에서 맞이했다.

결혼 당일, 집을 나가 근처 산중에서 도사(道士)와 양생설을 논하다가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잊었다.

다음날 새벽에 사람들이 찾아내어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해 봄, 신부와 고향으로 돌아와서 변한 태도로 독서와 공부 등 수양하는 일에 열중했다고 한다.

 

양명은 강서(江西) 광신에서 주자학자인 누량(婁諒, 1422~1491)을 만났다.

누량은 양명에게 송대 유학자의 격물(格物) 학설을 얘기하고, 이렇게 알려 주었다.

"반드시 공부해서 성인에 도달할 수 있다" 

 

21세 때는 향시(鄕試, 본적 성省에서 보는 시험)에 합격했으나 회시(會試, 향시 합격 후 북경에 올라가서 보는 시험)에는 낙제했다.

그때 북경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주자의 책을 구해서 공부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그것 나름의 '이치(理)'가 있다는 주자의 말에 대해

왕수인은 그 이치를 끝까지 캐묻는 것이 격물궁리(格物窮理)라는 말을 듣고 관서에 있는 대나무를 7일 동안 바라보며 격물을 했다.

이 일을 지속하다가 병이 들어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이것이 주자학을 불신하고 환멸감을 느낀 원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격물(格物): 

격(格)은 정(正)이고, 물(物)은 사(事)이니 곧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왕양명은 격(格)을 '바로잡다' 로 해석하여, 사람의 참다운 양지(良知)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고 옳은 생각을 행해야 마음의 본체인 물(物)이 회복된다고 보아, 마음을 바로잡아 양지를 발휘하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확립하였다.

참고로,

주자는 격물에 대해 격(格)을 '이른다(나아간다.)' 치(致)는 '이른다(지극하게 하다.)' 로 해석하여

모든 사물의 이치(理致)를 끝까지 파고들어 가면 앎에 이른다[致知]고 하는, 

'사물에 임하여 그 이치를 궁구하는 즉물궁리(卽物窮理)'라 한다.

 

 

그런 일이 벌어진 후에 양명은 어귀나 문장을 암기하는 사장(문장과 시가)의 학문에 집중하기도 했고,

불교와 노장에 빠지기도 했다.

 

26세 때 북경에 갔는데, 변경 문제로 인해 시끄러운 시기였기에 무예와 병법학에 열중하기도 했다.

 

그 다음해가 되자, 격한 불안감과 동요가 양명을 엄습했다.

오랫동안 노력해 왔던 시문(時文)의 도(道)는 남자로서 일생을 바쳐 해야 하는 일인가?
무엇이 참된 학문인가?
어떻게 그런 것을 구할 것인가?
나는 성현(성인과 현인)의 자질이 있는가?

 

이런 의문에 시달린 후에는, 회시 불합격과 건강 문제 등 복합적 요인으로 인해,

유학을 버리고 산속으로 가서 도가의 양생설을 익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는 한편, 왕수인은 다시 시험에 정진하여,

홍치(弘治) 12년(1499) 28세에 회시(會試)에 합격하였고, 이윽고 전시(殿試)에도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공부(工部)에서 관정(觀政, 연수)을 하였고, 다음 해에는 형부(刑部) 운남청리사(雲南淸吏司) 주사(主事)를 제수받았다. 

 

 

30대 시절: 인정의 자연성을 깨닫고, 유학으로 복귀

홍치 14년(1501) 30세에는 강북(江北)에서 형벌을 받은 죄수를 심의, 기록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승방(僧房)을 방문하기도 하고, 도사에게 도를 묻기도 했다.

 

31세에는 병을 이유로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양명동에 집을 짓고, 도가의 도인술을 수련하였다.

관리 생활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 동료가 도를 추구하는 뜻이 없고 시문의 재주를 다투고 있는 것을 보고 분노했던 적도 있었지만,

아마도 회의와 분노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건강 문제가 주요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세속을 떠나 가족과 떨어져서 양명동에서 독거하던 중 한 번의 깨달음이 찾아온다.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생각이 인간 본래의 마음인데, 성인의 가르침은 그 인정(人情)의 자연에 따르지만

도교나 불교는 그 자연스런 정감을 무리하게 끊고 다만 정신을 갖고 노는 데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양명은 다년간 가까이 했던 도교와 불교를 결단하고 떠나서 유학에 복귀했다.

20년 동안 계속됐던 그의 회의와 방황의 시대도 양명동에서의 깨달음을 통해 종지부를 찍었다.

 

건강을 회복하고 나서, 관직 복귀를 결정하고 33세에 북경으로 돌아갔다.

다음해에는 동지를 모아놓고 성학(聖學)을 강의했다.

당시에 양명은 유학의 본래 취지에 근본을 두고 학문은 성인이 되려고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정도였다.

 

아직 독창적인 사상은 없었다. 

그 당시에 일찍이 양명을 이해하며 일생동안 충언을 해주었던 선배 담약수를 얻게 됐다.

 

*담약수(湛若水, 1466년~1560년, 중국 명나라의 유학자, 호는 감천(甘泉))는

백사(白沙) 진헌장(陳獻章)에게 배운 고결한 선비로서

담약수의 학문은 '자득(自得)'을 근본 취지로 해서 선학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유가의 이상을 잊은 사람은 아니었다.

 

 

사상 개척과 발전: 심즉리(心卽理), 지행합일(知行合一)

35세 때, 당시 간신배에 대한 반감과 부패한 정치에 대한 양명의 정의심으로 초래된

귀주(貴州) 용장(龍場)에로의 유배는 양명이 독창적인 사상을 품게 된 단초가 되었다.

 

새로 즉위한 무종(武宗) 정덕제(正德帝)에게 언관(言官) 대선(戴銑)과 박언휘(薄彦徽)는

권력을 맘대로 휘두른 환관 유근(劉瑾)을 경계할 것을 상주하였다.

그러나 천자의 뜻에 거역했다는 명목으로 두 사람은 감옥에 감금됐다.

왕수인은 두 사람의 석방을 탄원했지만 오히려 장형 40대를 받고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회복하였고,

용장역승(龍場驛丞)에 임명돼 유배를 가게됐다.

 

양명이 용장에 도착한 것은 다음해 봄, 37세 때였다. 

용장은 귀주 서북 지역에 위치하여 겹겹이 산에 둘러 싸여 있는 변방이었다.

주민은 굴속에서 사는 만족(蠻族) 아니면 유배되어 온 한족이었다.

기후는 불순하고 벌레와 뱀이 우글거렸다.

 

게다가 역승이라는 관직명만 있었을 뿐 거처할 관사도 없었으며,

대화 나눌 친구도 없고 공부할 책도 없는 완전한 귀양살이였다.

 

그런 어쩔 수 없는 고달프고 적막한 변두리에서 생활하며 양명은 사색을 거듭했다.

사색을 통해, 양명은 참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한 몸의 주체인 자신의 '마음(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이야말로 모든 일과 이치의 근원이었다.

마음은 모든 사람한테 있는 것이다.

 

"성인의 도는 나의 본성에 이미 넉넉한데, 예전에 외부 사물에서 이치를 구한 시도는 잘못이었다" 

 

양명은 이렇게 깨달았다. 그 후에는 다년간의 의문이 잇달아 풀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주자의 학설은 이치와 마음을 둘로 나누는 잘못을 범했으므로

 

"심즉리(心卽理)"라고 수정을 해야 했고,

앎(知)과 실천(行)은 원래 분리할 수 없는 것이므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양명은 이렇게 깨닫고 몸과 마음에 활력이 생겨서 3년의 객지 생활을 인내할 수 있었고, 그런 생활을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무지한 오랑캐조차도 양명한테 가서 서원(書院)을 건설하는 일에 협력하기도 했다. 가르침까지 받았다.

 

양명의 이름이 인근에 퍼져서 귀주 제학부사(提學副使, 지방 학사를 관리하는 관리) 석서(席書)가 내방해서 학문을 묻고

새롭게 귀양서원(貴陽書院)을 수리해서 왕수인을 학장으로 맞이했다.

 

이후 왕수인을 질투하고 견제하고 박해하던 유근이 죽자, 왕수인은 강서(江西) 여릉(廬陵) 지현(知縣)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약 10년 동안 양명은 관리로 일하면서 순탄한 길을 걸었다.

 

 

군사지휘자로서의 면모와 치양지(致良知) 학설 확립 , 참된 지행합일 실천

양명은 남경, 북경, 회계, 제주, 남창, 장주 등 각지로 전임되고 승진했다.

이 시기는 양명이 일생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약했던 시절이다.

 

특히 45세부터 3년 동안 강서, 복건의 각지에서 설치던 무장도둑 무리를 토벌하고, 남창에서도 맹위를 떨쳤다.

유능한 병법가로서 군사업무를 처리하였다.

 

또한 명나라에 반기를 들었던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 평정 업무에 힘썼다.

그러나 군사, 정치 업무 때문에 매우 나쁜 상황에서도,

공부하는 일과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양명은 그 사이에 "사상마련(事上磨鍊)"(일이 있는 현장에서도 공부하고, 수양하는 일)을 강의하고,

천리를 간직하고 인욕[人欲]을 제거하라고 주장했다.

 

"도문학(道問學)은 존덕성(尊德性)의 공부이다. 박문(博文)은 약례(約禮)의 공부이다" 

 

양명이 주장한 학설의 정점에 있는 치양지설도 그러한 과정 속에서 무르익어 갔다.

 

양명은 사제 관계를 엄격하게 따지지 않고 함께 공부하고 즐기는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가득찬 학풍이 있었다.

이러한 왕양명 교단의 특이한 분위기는

엄숙함을 위주로 하는 일반적인 주자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 자체가 이단의 학문으로 취급되기에 충분했다.

 

영왕 신호의 난리를 평정한 양명의 공훈을 시기질투한 환관 허충(許忠), 이태(李泰)의 모함으로 도리어 한때 양명이 위협받기도 했다. 

무종이 죽고 세종이 즉위하자 형세가 완전히 변해서 양명의 공훈이 재평가 되었다.

 

정덕제가 사망하고 가정제가 즉위한 1521년 음력 11월 9일,

50세 양명은 신건백[新建伯]에 봉해지고, 남경병부상서[南京兵部尙書]를 겸하게 되었다. 

그 생애 전반을 통틀어 가장 괜찮은 시기였다.

 

그 이듬해에 사태가 또 변해서 양명의 아버지는 죽고, 양명의 공훈을 시기질투하던 간신배 무리들, 사회의 암덩어리들 때문에 다시 왕양명의 신변이 위태로워진다.

이후 56세까지 6년이라는 세월 동안 고향에서 아무 임무도 없이 지냈다.

이처럼 강력한 '사회적 벌레'들한테 왕양명은 당한 셈이다.

 

그 사이 활발히 강학 활동을 하며, 양명은 양지[良知]의 학설을 수립했다.

 

인간의 양지는 시비,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이므로

천인일리(天人一理) 만물일체의 관념에 근본을 두고 활발하게 천도에 통하는 것이 되었다.

 

56세가 되던 5월에 광서(廣西)의 도적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고,

양명은 9월에 출발해서 강서, 광동(廣東)을 거쳐 광서에 도착하자 아픈 몸으로 무리하게 임무에 열중했다.

 

양명은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문인(文人) 전덕홍, 왕기와 천천교에서 도를 논하고 사구교(四句敎)로써 학술의 종지를 개괄했다.

양명은 군사 활동에서 토적(土賊, 지방의 도둑떼)이 봉기한 원인이 조정의 부조리하고 말엽적인 정책에 있다고 생각했다.

근본적인 정책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따라서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토벌하는 것보다는 은혜를 베푸는 방법을 써서 강도 무리를 진정시켰다.

배움터를 건립해서 교화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더운 지역에서 극히 힘든 일에 복무하는 것은 병든 몸에 치명타였다.

병세가 차츰 나빠져서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귀로에 올랐다.

57세의 나이, 가정 7년(1528) 10월 29일. 광동성 경계에서 광서로 들어가던 도중에 결국 타계했다.

임종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이 마음이 환히 밝은데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왕양명 사상 요약

1. 심즉리(心卽理)

성리학은 이기가 나뉘어 청정과 혼탁의 구별이 생기게 되므로

태어날 때 부터 기질이 깨끗한 자는 도덕성이 높아 조금만 노력해도 출세하고,

태어날 때 부터 기질이 탁한 자는 엄청나게 노력해야 성취가 있게 되어 계급이 결정지어집니다. 

이에 반해, 

양명학은 이기가 합쳐져서 자신의 마음이 이치가 되기 때문에

자신 마음에 본래 있던 양지(良知)를 함양하면 계급, 태생과 상관없이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리학에서는 이(理)와 기(氣)를 이원화해서 이기이원론이라 하는데

양명학에서는 "이치는 곧 기"(理卽氣)라고 하여 일원화한다.

 

성정론(情, 성(性, 이理)과 정(情, 현실의 마음의 작용)) 역시

성리학에서는 성(性)을 이로, 마음(心)을 기로 보고,

정은 성을 현혹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서 성을 실현하기 위해 정을 규제해야 한다는

주희의 성즉리(性卽理)·심즉기(心卽氣) 이지만,

 

양명학에서는 심즉리(心卽理)라고 하여 성(性)과 정(情)의 구별을 두지 않는다.

이미 정 안에 '양지(良知)'가 갖추어져 있으며,

이가 곧 마음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사물은 마음 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유심론에 귀착할 수 밖에 없다. 

 

2. 치양지(致良知)

"깊은 궁리를 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것이 양지이다. 2, 3세의 어린이도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는 없다"

 

양지(良知, 배우지 않고도 아는 것)는 맹자가 제일 처음 말했습니다.

양능(良能)으로서 직관적이고 즉각적인 인간의 선천적 인식 능력을 말합니다.

 

맹자에게 있어 마음은 생각을 관장하고,

맹자의 마음 개념을 계승하는 양명은 

양지를 만인이 태어날 때 부터 다 같이 갖는 선천적인 마음이라고 해석합니다.

 

왕양명은 양지를 하늘(天)이자 하늘의 이치(天理)인 동시에

인간 마음의 본체로서 시비선악의 판단을 갖추고 있는 선천적으로 구비된 사려(思慮) 이전의 자연스러운 것

즉 '양심'에 가까운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는 주자 실천론에 비하면 자유로운 해방감이 수반됩니다.


왕양명은 이러한 선천적인 양지를 믿고 그것을 최대한 발현시킨다면 사욕은 소멸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희로애락 등의 감정은 본래 우리에게 있으므로 그것의 자연스러운 발로가 양지의 작용이라면서,

성리학처럼 '양지는 선(善), 칠정(七情)은 악(惡)' 이라고 나누어 말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다만 칠정에 고착해 집착한다면 그것은 욕(欲)이 되어 양지는 은폐되고 만다.

성리학은 도덕성을 함양한 제대로된 인간이 되려면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앎을 이루어야 된다고 하여 지식의 함양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양명학에서는 제대로된 인간이 되려면

사물에 대한 지식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물욕을 버리라고 하여 도덕적 실천을 중요하게 여겼다.

 

3. 지행합일(知行合一)

왕양명이 말하는 '지행합일'이란 경험적 체험이 곧 지식의 형성 과정과 일체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주희는 앎(知)과 행위(行)의 문제는 서로 분리 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주자어류》에서 주희와 제자의 문답 중, 다음 대목이 있다.

“선후(先後)를 논하자면 앎이 먼저이지만, 경중(輕重)을 논하자면 실천(行)이 중하다.”

 

주희는 객관적인 이치를 체득한 이후에야 도덕적 판단이 가능하고, 선(善)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격물(格物)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왕양명의 경우에는 앎과 행위의 문제가 이원적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왕양명은 ‘양지(良知)’가 이미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말했는데, 여기서의 양지는 주희가 말하는 ‘이(理)’와 다르다.

 

주희의 '이'개념이 존재론적인 실체라고 한다면,

왕양명이 말하는 양지는 (도덕적) 지식을 체득할 수 있는 의식이다.

 

왕양명에게 있어서 '마음(心)'은 도덕적 품성을 이미 내재하고 있는 게 아니라

‘도덕적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의식’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앎은 대상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성취’될 수 있다.

 

《전습록》을 보면 ‘마음 밖에 사태와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산의 꽃은 스스로 피고 지는 것 아닌가?’ 하고 물어보는 제자에게 이렇게 답하였다.

“자네가 이 꽃을 아직 보지 않았을 때 이 꽃과 자네의 마음은 모두 적막하였다.
하지만 자네가 이 꽃을 보자마자 이 꽃의 모습이 일시에 드러났다.”

 

주희의 입장이라면 이미 ‘꽃’은 외재적 대상으로서 실재하지만,

왕양명의 경우에는 꽃이라는 대상이 실재하는지 아닌지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왕양명에게는 꽃이라는 대상을 지각함으로써 ‘꽃이 핀다’고 하는 지식이 완성되었고

내 마음 안의 형상으로 각인되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였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명제도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행위와 분리할 수 없다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야지,

행위와 지식의 경계를 구분하고

도덕적 실천이 도덕적 지식을 보장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어느 학문 및 학파를 막론하고, 근본에 대한 탐구 정신은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방법과 사상에 따라 많은 차이가 형성되고,

그 결과 인식관과 세계관이 달라지고, 파벌이 생기며 조화에서 멀어지게 되지만요. 

 

결국, 유학자로서 주자와 양명 모두,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하라고 권할 뿐입니다.

그 원리 및 실천 과정에서 이와 기를 구분해서 볼지, 하나로 볼지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많이 달라집니다.

 

사실, 조화는 각자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본질적이고 가장 단순한 태도에서 기인하고 형성되겠습니다. 

 


 


왕양명이 용장에서 도를 깨우치기까지의 다섯 번의 변화를

그의 친구인 감천(甘泉) 담약수(湛若水)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첫째는 임협(任俠)을 익히는 데 빠졌고, 둘째는 기사(騎射)를, 셋째는 사장(詞章)을,
넷째는 신선(神仙)을 익히는 데 빠졌고, 다섯째는 불교에 빠졌다." 

 

다방면에 관심을 가졌지만, 결국 하나의 사상으로 귀결해 낸 학자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주자 유가의 구분적 사고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저는, 그의 심학에 특히 동의하는데요.

 

여러분은 그의 심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오늘의 생각거리.

1. 사단칠정 중, 감정은 악인가?

2. 칸트의 코페르쿠니스적 전회라고 하는 인식론과 유심론이라고 치부받는 왕양명 심즉리의 차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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