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사업하는 철학자입니다.
2월 16일은 윤동주 시인이 서거한 지 8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오늘은 윤동주 시인과 그의 생애, 그리고 대표작에 대해 이야기 나눠볼게요.
이야기가 많아서 2편으로 나누었습니다.
윤동주 소개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1945년 2월 16일 향년 27세)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시인(민족시인), 작가
본관은 파평(坡平), 아호는 해환(海煥)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함경북도 청진시 포항동 76번지이다.
26살,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됐다.
그곳에서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시신은 화장된 뒤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그 해 3월 장례식을 치른 후 길림성(지린성) 용정시(룽징시, 龙井市)에 유해가 묻혔다.
본명 외에 똥주와 쭈쭈라는 필명도 사용하였다.
윤동주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1990년대 후반 이후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윤동주는 일제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한다.
직접적인 무장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저항시, 그리고 삶의 고뇌에 대한 시를 많이 썼고
2010년에 세상에 공개된 윤동주 재판 관련 문서에서도 열정적으로 토로한 모습이 드러난다.
그는 당시 악명 높았던 특고 앞에서도, 일제 재판관 앞에서도 당당한 독립투사였다.
윤동주는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일본 유학으로 인해 민족과 다른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고 이에 대해 부끄러워했지만지만
1930년대부터 일제의 강압과 회유책에 많은 문인들이 절필 혹은 변절하는 세태 속에
죽는 날까지 독립운동을 하다 죽었기 때문에 이육사와 더불어 민족시인으로 추앙받는다.
*두만강 북쪽 지역의 북간도를 동간도라고도 칭한다.
명동촌은 척박한 땅이었다.
19세기말,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조선인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서 간도로 대거 이주했다.
미국의 청교도처럼 종교적인 이유에서 새로운 촌락 공동체를 건설했는데,
구세동(救世洞)·영생동(永生洞)·낙원동(樂園洞)·명신동(明信洞)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1899년, 함경도 출신 김약연, 김하규, 문병규 등이 140여 명의 식솔을 이끌고
동간도로 집단 이주한 후,
'동방을 밝히는 곳(明東村)'이라는 뜻을 지닌 동간도 최대의 한인촌(韓人村)을 형성했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성군 동풍면 상장포에 거주하다가
1886년 길림성 자동으로 이주하였으며,
독실한 장로교회 장로인 조부 윤하현은 명동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1910년 명동학교의 설립자, 김약연의 누이동생인 김용과 결혼하고
명동학교에서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생애
[ 출생과 집안 ]
1917년 12월 30일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 현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고 용정시의
유복한 집안에서 개신교 장로이자,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의 손윗 누이 둘이 연이어 요절한 후에 태어난 첫 아이이자 집안의 기대가 남달랐다.
그의 출생지인 명동촌은 그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마을의 정신적 리더이자, 윤동주의 외숙부인 김약연 목사는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민족의 지도자를 신앙으로 양육한 인물로 윤동주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참고로,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도 거사 전,
명동촌에서 사격 연습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알려져 있다.
[ 수학 ]
요약:
명동학교(明東學校)에서 수학하였고,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와 서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를 졸업하였다.
연희전문학교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일본에 건너가 1942년 교토 도시샤 대학(同志社大學)에 입학하였다.
1925년 4월, 고종사촌형인 송몽규와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고, 1931년 3월 졸업한 후
송몽규와 함께 대랍자(大拉子)에 위치한 중국인 소학교인 화룡현립제일소학교 6학년(졸업반)에 편입하여 1년 수학했다.
이때의 경험은 그의 시 <별 헤는 밤>의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이란 구절로 나타난다.
1932년 3월, 화룡현립제일소학교를 졸업한 후,
캐나다 장로회에서 설립한 미션스쿨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은진중학교는 중화민국 학제에 따른 4년제 중등교육기관이었기에,
일본의 5년제 구제중학교/고등보통학교 대비 수학연한이 1년 짧았다.
이 때문에 졸업 후 일본 내지나 조선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전문학교입학검정시험(전검시험)이라는 검정고시를 별도로 치러야만 했다.
따라서, 진학을 위해 윤동주는 1935년 8월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졸업까지 한 학기만을 남겨둔 상태로
은진중학교를 중퇴하고 친구 문익환을 따라서 평양에 위치한 미션스쿨인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의 편입 시험을 치렀다.
그러나, 시험 결과 4학년 수준의 학력을 인정받는 데 실패하여,
1935년 9월, 숭실중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그런데, 1935년 연말부터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당국과 갈등을 겪다가
1936년 1월 20일부로 총독부 학무국장의 명령으로 교장이 해임되고 동맹휴교가 이어졌다.
이에, 반년만에 숭실중학교를 중퇴하고(4학년 수료)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다.
참고로, 숭실중학교는 1938년 3월 19일 자진 폐교했다.
문익환과 함께 평양에서 돌아간 윤동주는
1936년 4월, 간도의 유일한 일본식 5년제 중학교였던 용정 광명중학교(광명학원 중학부)에 4학년으로 편입하였다.
광명중학교는 일본육군사관학교와 더불어 특히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진학을 권유하는,
사관학교 입시 명문교로 명성을 떨치던 곳이었다.
1937년 12월 광명중학교 5학년을 마친 윤동주는
대성중을 졸업한 송몽규와 함께 구제전문학교 입시를 준비했다.
* 구제학교(舊制學校):
구제고등학교, 구제전문학교, 구제대학 등
일본의 학교교육법(1947년)이 시행되기 이전의 제도에 의거하여 설립된 교육기관을 일컫는다.
집안에서는 경성의전이나 세브란스의전과 같은 의대나 경성법전 진학을 강력하게 원했으나,
윤동주는 문과를 고집했다.
부친과 심한 갈등을 겪었으나, 할아버지가 그의 고집에 손을 들면서 그는 문과에 지원했다.
1938년 4월, 결국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국학 연구의 산실이었던 연희전문학교에서,
최현배에게서 조선어를, 손진태에게 역사를, 그리고 이양하에게 영문학을 배웠다.
윤동주가 최현배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조선어로 정제된 시를 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하던 시절 많은 명시가 쓰였다.
*최현배:
국어학자, 문학인. '한글 보편화'에 앞장선 인물로 평가받는다.
호는 '외솔'로, "외따로 서 있는 소나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중일전쟁의 격화로, 예정보다 3개월 빠른 1941년 12월,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조선의 유일한 구제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은 예과를 두고 신입생을 받았기 때문에
구제전문학교를 졸업한 그가 바로 학부에서 공부하기 위해서는 내지(일본)로 유학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 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제국대학 문학부의 선과생(특별 청강생) 선발시험에 응시했으나
사촌 송몽규만 합격했다.
윤동주는 도쿄에 위치한 미션스쿨인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선과생으로 입학했다.
이후 도시샤대학 문학부(영문과 선과생)로 편입해 교토로 옮겼다.
릿쿄대학의 교련 수업에서 고초를 당해, 갑자기 도시샤대학으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백세 철학자라 불리는 연세대 김형석 명예교수는
윤동주와 중학교 동기인데, 그에 따르면
도쿄의 대학 재학생들은 학도병으로 나가는 것(학도출진)이 강제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김형석 교수 본인 또한 윤동주와 함께 교토로 옮겨서 공부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
[ 투옥 ]
당시, 송몽규에게 '요시찰인(要視察人: 사상이나 보안 문제 따위와 관련하여 행정 당국이나 경찰이 감시하여야 할 사람)' 딱지가 붙어 있었다.
상시 감시 대상이었던 송몽규가 있는 교토로 간 것은
윤동주 스스로 일제 공안당국의 감시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과 같았다.
1943년 7월 10일, 송몽규가 '재경도(在京都, 교토에 있는)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체포되어
시모카모 경찰서로 압송되자
사흘 뒤, 윤동주도 고희욱과 함께 고오로기 사다오(興梠定) 형사에게 체포되어 취조를 받았다.
같은 해 12월, 송몽규, 고희욱과 함께 검찰국으로 넘겨졌고,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2형사부에서 2년형(미결 구류일수 산입)을 선고받아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송몽규가 조선독립, 민족계몽에 대해 논의하면서 다음처럼 주장하고,
징병제 실시를 이용,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을 체득, 태평양전쟁 강화협상이 진행될 즈음
무력봉기를 일으켜서 세계의 관심을 끌고 조선 독립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윤동주가 이에 동의해, 다수의 조선인 유학생으로 구성된 민족주의 집단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사망 ]
약 1년 7개월 동안 수감 생활에서 건강이 악화된 윤동주는
광복(1945년 8월 15일)을 불과 반년 앞둔 1945년 2월 16일 뇌일혈로 인해
향년 27세의 나이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요절하였다.
사망 이듬해인 1946년 11월 3일, 새 일본국 헌법 공포를 계기로 내려진 칙령 제511호에 따라 사면되었다.
사인이 일본의 염산물 생체실험이라는 견해가 있고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묘는 고향인 용정시에 있다.
윤동주가 죽고 얼마 후에 해방이 되고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그의 가족과 친인척들은 모두 북간도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의 무덤은 40년 넘게 북간도에 방치되어 있었다.
1992년 한중국교가 수립된 뒤,
육촌 동생인 가수 윤형주가 재종 형인 윤동주의 방치된 묘소를 찾아갔다.
송몽규 (宋夢奎)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생체 실험 의문에 대해,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 고노오 에이치가
1980년 <현대문학>지 5월호에 윤동주와 송몽규가 혈액대체 실험을 위한 실험 재료로 쓰여서 살해당했다는 글을 기고하였다.
윤동주 국적-조선족 정체성 논의 먼저
한때, 출신지역(두만강 북쪽의 땅 만주, 지금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일대) 문제로 인해 윤동주 국적 논의가 있었는데요.
그 출생지와 생활권인 용정시, 평양시, 서울특별시, 도쿄도, 교토부가
현재 규정과 달리, 당시 지정학적인 이유로 인해
일제강점기에는 커다란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여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최대 포털사이트인 바이두에서,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으로, 민족은 '조선족'으로 표기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재외동포'로 지칭하는 조선족들이
윤동주를 재외동포, 재중동포, '중국조선족 애국시인'으로 칭하기도 하는데요.
2007년, 중국은 윤동주가 살았던 명동촌 생가를 복원하고 연변조선족 자치주 중점 문화재 보호 단위로 지정했습니다.
2012년부터 용정시에서 윤동주 전람관을 건립하면서,
입구에 중국 내 조선족 출신 장관이자, 소수민족 문제를 주관하는 국가 민족 사무위원회 주임 이덕수가 쓴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 표지석이 세워졌습니다.
[ 조선족 개념 ]
중화인민공화국법상 조선족은
"민족은 조선 민족이며 국적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명확한 합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족 개념을 살펴보면,
조선족은 19세기 중엽부터 중국에서 거주하기 시작한 한민족 혈통의 사람들입니다.
1860년대와 1870년대에 조선에서 재해와 흉년이 연속으로 발생하자
많은 이재민들이 간도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1870년 만주 거주 조선인은 77,000명에 달하였고, 1900년에는 22만 명으로 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170만여 명에 달하였고, 해방 후 79만 명의 조선인은 귀국하였습니다.
중국인민공화국이 출범하면서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남은 조선인들을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규정했습니다.
더없이 넓게 생각해 보면,
윤동주는 이민 3세였으니, 충분히 논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 조선족 윤동주가 아닌 이유 ]
조선족들이 본인들은 중국인이라면서, 윤동주는 한국인이라는 한국인들의 인식을 지적하듯이,
윤동주 조부 윤하현은 1914년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아버지 윤영석도 같이 중국 적에 입적됩니다.
1917년 윤동주는 선천적 중국 국적자이고, 1918년도에 출생신고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1) 중국 현행 국적법에 따르면 출생지주의(속지주의)가 아닌 혈통주의(속인주의)이며
(2) 당시 1912년에 제정된 중화민국 국적법과 1899년의 일본제국 국적법에서,
하지만 일본은 조선인에게 헌법을 미적용하기에 국적법 적용도 아닌 호적으로만 분류합니다
이에 따르면, 함경북도 출신으로서 분단 전 한국인이 맞죠.
중국이 주장하는 역사속지주의, 역사나 문화 영역에만 속지주의를 적용하는 입장은
글로벌 사회에서 참 독단적인 모습이지요.
또한,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공산주의가 기독교를 배척하는 종교적 이유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의 가족과 친인척들이 모두 북간도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정체성, 문화 정신이 중국인이 아니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겠죠.
[ 한국인 윤동주 ]
이 외에,
1917년생인 윤동주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1949년) 이전 인물이므로,
국가를 기준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 학계에서도 꽤나 공공연한데요.
그렇다면, 기존 중국인들은 중국인이 아니고,
고려 시기 사람들, 조선 시대 사람들은 한국인이 아니겠습니까.
결코 타당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떠나서,
그가 조선족과 같이, 중국인이었다면, 일제 치하의 조국에 대한 애환이 왜 있었을까요.
그와 친밀했던 송몽규는 왜 대한 독립운동을 해 요시찰인으로 낙인찍혔을까요.
물론, 조선족인지, 조선인인지에 대한 소속 국가, 국적과 무관하게,
정체성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국적 기준에 따라서는 조선족일 수 있으나, 그 정신이 조선인 독립운동가라면 어떻게 분류돼야 할까요.
다음은 윤동주 국적 논쟁에 대해 보다 공론장으로서 댓글을 수록하고, 윤동주를 조선족으로 분류합니다.
https://www.ekw.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766
일견 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한국을 경제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조선족의 정체성부터 '한국인'으로 바로 잡아야겠습니다.
한중 관계에서 조선족들이 과연 우리처럼, 윤동주처럼, 한국을 열망하고 가슴 아파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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