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사업하는 철학자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때, 1천 원 권 주인공이 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에 대해 알아볼게요.
사단칠정 논쟁, 이기론 등 성리학, 유학의 주요 이론은 맹자로부터 유래돼
송대 유학 집대성자 주자, 그리고 현재까지 연구되고 있으며, 한국 학계에서는 계속해서 파벌이 나뉘고 있는데요.
정치관과 역사관이 그러하듯,
이에 따라 세계관, 인식관이 구성되기 때문에, 어찌 보면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주국인 중국보다, 오히려 한국에서 사단칠정 논쟁이 두드러졌습니다.
그 주역은 이기이원론의 주리론(主理論)을 제시하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퇴계 이황과
이기일원론의 주기론(主氣論)을 제시하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율곡(栗谷) 이이(李珥)입니다.
율곡은 관직에 적극 나선 반면, 퇴계는 예조판서 등 고위직도 사양하는 등 처세가 달랐습니다.
두 사람은 35세란 나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두어 차례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과 사상 면에서 깊은 유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이황은 권위, 편견을 두지 않고, 이언적, 이현보, 기대승 등과 교류했는데요.
오늘은 퇴계 이황에 대해 알아보고, 그 사상을 간략히 살펴볼게요.
이황 기본정보 및 생애
이황(李滉, 1502년 1월 13일-1571년 1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입니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동인과 남인 계열의 종주이며 일부 북인도 그의 문인들이었습니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입니다.
사후 이자(李子), 이부자(李夫子)로 존숭되었습니다.
참고로, 퇴계(退溪)는 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로, 물러나 시냇물 위에 머무르다는 뜻입니다.
[출생]
아버지 이식이 춘천박씨(박치의 장녀) 정경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퇴계 이황은 경북 안동시 예안면 온계리(溫溪里)에서
진사(進士) 이식(李埴)과 의성 김씨(문소 김 씨,2남 1녀)와 사별한 후,
춘천 박씨(5남)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의성(義城)의 고호, 옛 이름이 문소(聞韶)입니다. 따라서, 의성 김 씨, 문소 김 씨는 동일합니다.
아버지 이식이 40세 때 진사시에 합격한 해에
어머니가 태몽으로 '공자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황을 낳았다 하여
대문을 성림문(聖臨門)이라 일컬었습니다.
[성장 및 수학]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이황은 홀어머니 춘천박씨 밑에서 자랐으나, 대대로 물려오는 재산이 있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생활했습니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던 이황은 1512년(중종 7) 12세에 숙부 송재 이우(李堣)로부터 『논어』를 배웠습니다.
1514년(중종 9) 14세 무렵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특히 도연명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여,
도연명과 주자를 인생의 모범 인물인 사표로 삼았습니다.
숙부 이우에게 수학한 뒤 향리의 용수사에서 공부하였고,
1520년(중종 15) 20세 무렵부터 『주역』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침식을 잊고 밤낮으로 독서를 해서, 이때 건강을 해쳐서 병을 얻었고, 이후부터 잔병치레에 시달렸습니다.
[결혼 및 자녀]
퇴계 이황은 일찍이 김해 허씨와 결혼하였으나 27세에 상처하고,
하는 수 없이 관습대로 첩을 한 사람 들였습니다.
첩도 서자 1명을 낳고 일찍 요절하였습니다.
그 첩은 집안 살림을 잘 돌보면서 퇴계는 물론, 어린 두 아들도 친모처럼 잘 챙겨주었다고 합니다.
또 나중에 온전치 못한 둘째 부인 권 씨를 맞이한 후에도
장애가 있는 권씨를 대신해 실질적인 안살림을 충실하게 챙겼습니다.
상처한 후 권질이 정신질환이 있는 그의 딸을 의탁하기를 청하자, 이황은 거절하지 못하고 권질의 딸을 받아들였습니다.
재혼한 안동 권씨 역시 46세에 사망하였으며 둘째 아들과 증손의 요절을 보았습니다.
퇴계는 본부인 허씨 소생 자녀들에게 생모와 계모를 차별하지 말도록 가르쳤고,
첩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첩이 죽은 후에도 그녀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적)을 자신의 호적에 올렸고,
차후에 이적의 후손들이 적서 차별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족보에 적서의 구별을 두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두 자녀들에게도 친어머니와 동일하게 대하라고 했습니다.
권씨권 씨 부인이 사망한 뒤에도 자녀들은 권 씨 부인의 3년상을 시묘살이 하였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하는 모습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렇게 생애를 알고 보니, 더 존경스럽습니다.
권 씨 부인을 사이코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요.
그 삶을 알게 되면, 또 이해도 갑니다.
(이해에 선이 있어야 할 뿐, 역시 이해 못 할 일은 없죠.)
권 씨 부인의 할아버지 권주(權柱, 1457-1505)는 갑자사회(1504년) 때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 씨에게 사약을 가져갔다는 죄목으로 평해 땅에 유배된 후 교살당하였고, 할머니는 관노가 되었습니다.
친정아버지 권질은 연산군을 비방하는 언문 투서사건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습니다.
아버지 권질은 1506년 중종반정 이후 해배(解配)되었으나, 기묘사화 후 다시 무고(誣告)로 인한 옥사인 무옥으로 유배됐습니다.
[학문과 업적]
영남학파의 창시자 이언적의 사상을 이어받아 영남학파의 핵심 학자가 되었으며
나아가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그의 문하에서는 저명한 학자들과, 당대의 정승 10여 명과, 판서 30여 명이 배출되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는 유성룡과 김성일입니다.
한강 정구는 미수 허목에게 이어지며, 허목은 성호 이익 등 남인 실학자로 이어집니다.
또한 여헌 장현광 등은 이황과 이이 학설의 절충을 합니다.
이황 자신은 동서 분당 전에 죽었기 때문에 당파에 소속되지 않지만,
그 학맥은 동서 분당 뒤에 동인의 핵심을 이루고,
다시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이황 제자들은 남인, 조식 제자들은 북인을 이루었습니다.
- 1528년(중종 23) 28세에 소과인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1533년(중종 28) 성균관에서 하서 김인후와 더불어 서로 교유하며
《심경부주 心經附註》에 크게 심취하였다.
조광조의 제자인 이연경(李延慶)의 문인 노수신과도 만나 친분을 쌓았는데,
이황은 조광조의 직계 제자는 아니었으나 노수신을 통해 조광조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533년 귀향 도중 김안국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 1534년(중종 29) 3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관직에 들여섰습니다.
- 1540년(중종 35)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는 등 승진을 거듭하였다.
- 1543년(중종 38) 성묘를 핑계 삼아 사직하고 고향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이후 조정에서 다시 불러 1545년(인종 원년) 6월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이 되었다.
바로 일본과 강화를 하고 변경을 방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 1545년(명종 즉위년) 10월 을사사화의 역신인 김저와 같은 무리라 탄핵당하여 삭탈관직 당했으나, 10월 말 이기가 죄가 없다며 회복됐다.
- 1546년(명종 원년) 46세에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그해 3월 지제교(知製敎)로 있을 때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을 잘못 지어 사은사 남세건의 탄핵을 당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신광한(申光漢)의 변호로 처벌을 모면하였다. - 1548년(명종 3) 1월 충청도 단양군수로 부임하였다가,
얼마 되지 않아 형 이해가 충청도 관찰사로 발령받자,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경상도 풍기군수로 옮겼다.
풍기군수 시절에 서원들을 지원하였으며, 소수서원 사액(賜額)을 실현시켰다.
이는 사림파의 세력이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친필 사액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듦으로써 사액 서원의 모범 선례가 되었고,
사림파는 서원을 근거지 삼아 세력을 확대해 나가게 됐습니다.
참고로, 소수서원 참 아름답습니다. 소나무도 운치 있고요. 방문 추천드립니다.
https://k-seowon.or.kr/?act=info.page&pcode=sub3_1
- 1552년(명종 7년)에 불교를 배척할 것을 건의하였다.
중요하니까, 왜 불교를 배척하려 했는지 살펴볼게요.
임금이 힘써야 할 일은 경술(經術)을 택하고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공(覇功)을 억제하는 것일 뿐인데,
조금만 잡되어도 패도로 흐르게 됩니다.
지금은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려지기를 도모할 때여서 바야흐로 왕도가 행해지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가 조금이라도 섞이게 되면, 비록 왕도에 마음을 다하더라도 마침내는 불교에 빠지고 맙니다.
지금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기는 하나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도에는 미진한 점이 있는 듯싶습니다.
그 설(說)에 ‘백성들의 고통을 없애고 나라의 복을 연장하는 것은 이 가르침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격치(格致)의 학문에 밝아 그 거짓됨을 환히 안다면 권하더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 1553년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사직상소를 올렸다.
이후 성균관대사성·부제학·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앞서 풍기 군수의 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그는 한서암을 짓고 - 1557년 57세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이가 그를 방문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명종은 그를 존경하여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퇴계는 조광조의 죽음을 봤기에, 왕의 출사 요청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명종이 그가 관직에 나오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화공에 명하여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오게 하며,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하여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하였다.
이황 사상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그의 저술 중 일부를 약탈해 갔고, 이로써 일본 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됩니다.
퇴계 이황의 사상은 50~60세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변론·저술·편저 등 중요한 것은 모두 이 기간에 되었으며,
《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록》, 《계몽전의》, 《심경석의》, 《무진육조소》, 《성학십도》 및
기대승과 문답한 《사단칠정분리기서》와 같은 것은 그의 대표적인 명저입니다.
평생 겸손함을 강조하며 청렴하게 살았으며,
생각이나 헤아림을 멈춘 상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는 사색과 '경'(敬)을 중시했습니다.
퇴계 이황은 불교와 양명학을 이단이자 화(禍)로 간주하고, 한결같이 배척했습니다.
<전습록변>(傳習錄辨)에서 양명학을 '사문(斯文·주자학)의 화'라고 비판한 다음부터 금기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에는 양명학의 핵심인 '치양지설'(致良知說)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으니 <전습록> 전체를 보지 못하고 비판한 셈이 된다고 평가됩니다.
역시 학문이나 인간관계나 종합적으로 비판하는 태도가 필수이겠습니다.
[이기이원론-사단칠정론]
이와 기 중, 이를 강조하는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을 계승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 이(理): 만물의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원리. 순수하며 완전한 존재.
- 기(氣): 물질적이고 변화하는 요소. 이의 구현을 통해 형체화됨.
이황은 주역을 공부한 학자답게, 우주 만물은 이와 기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퇴계는 이와 기가 상호 의존하지만,
이는 항상 기에 앞서고 기를 지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언적에 따라, 이선기후설(理先氣後設)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며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니,
즉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며 구분하였습니다.
심성 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이기이원으로 분석하였습니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사단칠정론’입니다.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론: 리발 여부]
퇴계는 사단과 칠정을 본질적으로 이와 기의 구별로 설명하였습니다.
- 사단은 이(理)에 의해 발현된 순수한 도덕적 감정으로 선(善)의 원천.
- 칠정은 기에 의해 발현된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정서로 도덕적이지 않을 수도 있음.
이에 반해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을 엄격히 분리하기보다는 동일한 감정의 다른 측면으로 보았습니다.
이 논쟁은 조선 성리학에서 중요한 사상적 분기점을 만들었습니다.
- 사단(四端):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네 가지 도덕적 감정(인, 의, 예, 지).
- 칠정(七情): 기에 의해 발현되는 인간의 감정(희, 노, 애, 구, 애, 오, 욕).
이황의 명제가 리와 기를 서로 구분한다면,
기대승奇大升, 1527년 12월 21일-1572년 12월 15일)은 리와 기가 '불상리(不相離: 서로 떨어지지 않음, 함께 있음)를 주장했습니다.
이황은 기대승의 비판을 받아들여서 다음과 같이 명제를 바꾸었습니다.
"四端 = 理發而氣隨之, 七情 = 氣發而理乘之"
4단은 리가 드러나면 기가 그것을 따르고, 7정은 기가 드러나면 리가 그것을 올라탄다.
이 명제는 '而' 이하의 뒷부분을 빼면 "4단-리발, 7정-기발"로, 이황의 원래 명제인 이기이원론과 같습니다.
이황은 리와 기의 '불상잡(不相雜: 서로 섞이지 않음, 떨어짐, 분리됨, 구별됨)을 주장했습니다.
기대승은 붙음을 주장해서 리와 기를 하나로 만들고, 리가 드러남을 부정하고 기만 드러남을 주장합니다.
이황의 두 명제 중, 기발(氣發)만 인정하는 셈이죠.
반면 이황은 리와 기를 분리시켜서, 리발과 기발을 다 인정합니다.
2 원론이다. 이렇게 되면 논쟁은 리발을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나간다.
이황은 <주자어류>를 읽다가, 주희가 "4단 = 理之發, 7정 = 氣之發"이라 한 것을 발견하고는,
주희의 말을 따르자고 기대승에게 제안합니다.
하지만, 기대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데요.
뒤에 율곡 이이가 기대승의 입장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경(敬)]
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으로 지와 행의 일치를 주장합니다.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誠)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경(敬)’이 있을 뿐이라 하였는데요.
퇴계는 "경이란 곧 이치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는 태도"라고 설명하며,
마음의 흐트러짐을 방지하고 도덕적 자기완성을 이루기 위한 실천으로 경을 중시했습니다.
곧, 퇴계는 "경(敬)"을 실천적 수양의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 경(敬): 마음을 올바르게 집중시키고, 외부와 내부의 혼란을 제어하는 태도.
경은 단순한 정신 집중을 넘어, 마음의 본성을 깨닫고 이를 일상에서 구현하는 생활철학으로 발전했습니다
실로 그의 학문·인생관은 이 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 경을 70여 생애를 통하여 실천한 것이 이황이었습니다.
그는 문학·고증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 사상·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양명학에 대해서는 이전 포스팅을 참고하세요.
2024.12.10 - [공부와 서적] - 왕수인: 왕양명 인물 탐색-심학, 심즉리, 치양지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공부와 서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숫자 감각의 힘 - 데이터 '분석'의 중요성 (2) | 2025.01.07 |
---|---|
경제금융용어 700선: 1-5쪽 (8) | 2025.01.02 |
경제금융용어 700선 배워가기-한국은행 발간(2023) (2) | 2025.01.01 |
크리스마스, 트리와 산타클로스 유래 (4) | 2024.12.24 |
한국문집: 여유당전서-『심경밀험』-심성총의(心性總義) (1) | 2024.12.20 |
중국(중화인민공화국) 지도 살펴보기: 22개 성과 약칭 (4) | 2024.12.18 |
중국 뉴스: 12.13 리지아차오 보고 받은 시진핑 (5) | 2024.12.14 |
중국 유학 계보와 흐름 살펴보기 (4) | 2024.12.13 |